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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9-8-10-5-4-4-1 그리고 세계 정상

강등팀 원딜에서 세계 최고 원딜로 만개
‘고스트’ 장용준이 걸어온 길

라이엇 게임즈 제공


10-8-9-8-10-5-4-4-1. 담원 게이밍(한국) ‘고스트’ 장용준이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쭉 받아온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성적표다. 꼴찌부터 시작했다. 중위권을 거쳐 국내 정상까지 올랐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전 세계 모든 프로게이머의 꿈인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담원은 31일(한국시간) 중국 상하이 푸둥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롤드컵 결승전에서 쑤닝(중국)을 세트스코어 3대 1로 꺾었다. LCK 소속팀이 롤드컵을 우승한 건 2017년 삼성 갤럭시 이후 3년 만이다.

장용준에겐 유독 감회가 남다를 우승이다. 장용준의 프로게이머 커리어엔 유독 굴곡이 많았다. 그는 2016년 CJ 엔투스에서 데뷔했다. 두 세트 출전했지만 인상 깊은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단 1킬도 올리지 못한 채로 데뷔 시즌이 끝났다. 팀은 서머 시즌 이후 치러진 승격강등전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내 2부 리그인 챌린저스로 강등됐다.

이듬해 BBQ 올리버스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곳에서도 앞길이 순탄치 않았다. 팀은 매번 하위권을 전전했고, 그는 두 차례 승강전을 더 치렀다. 2017년엔 LCK에 잔류할 수 있었지만, 2018년엔 그렇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의 이전 소속팀인 샌드박스 게이밍과 현재 소속팀인 담원에 덜미를 잡혀 두 번째 강등의 아픔을 겪었다.

미운 오리가 백조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건 2019년이었다. 장용준은 승격팀인 샌드박스에 입단했다. 사실상 LCK란 무대에서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그곳에서 데뷔 이후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 그는 ‘조커’ 조재읍과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여유를 되찾았다. 샌드박스가 스프링 정규 시즌 4위, 포스트 시즌 5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장용준은 샌드박스에서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는 당시 “자신감과 팀원의 케어가 발전의 원동력”이라면서 “작년보다 게임이 쉽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전에는 앞이 막막했는데, 지금은 계속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지난해에는 맞기만 했다. 바텀 위주로 팀을 운영하기보다는 후반 대규모 교전을 바라보거나, 상체 위주로 게임을 진행했다. 버티기 위주로 게임을 하다 보니 때리는 법을 잊어버렸는데, 공격적인 색깔의 팀에서 활동하면서 잃어버렸던 공격성을 찾았다.”

샌드박스에서의 서머 시즌은 스프링 시즌보다 덜 두드러졌다. 장용준은 샌드박스와의 동행을 1년 만에 마치고 자유 계약(FA) 시장에 나왔다. 올해 스프링 시즌 1라운드 동안 휴식을 취한 그는 2라운드 시작을 앞두고 담원에 입단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장용준과 담원의 기적이 시작됐다.

담원은 장용준의 가세 이후 치명적 단점으로 지목됐던 운영 문제를 개선했다. 장용준은 한때 정글러로 포지션 변경을 고민하기도 했을 만큼 두뇌 플레이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다. 영리한 다섯 명이 시너지 효과를 내자 곧 국내엔 적수가 없어졌다. 담원은 창단 첫 LCK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담원 선수들은 롤드컵 내내 늘어난 캐리 옵션이 지난해와의 다른 점이라고 말했다. 장용준이 애쉬, 케이틀린 등으로 바텀 캐리를 해내자 담원의 밴픽 스펙트럼이 광활해졌다. 공격적인 챔피언을 주로 골랐던 ‘너구리’ 장하권이 룰루, 오른 등 서포터와 탱커 챔피언을 고를 수 있게 됐다. 담원은 이날 결승전에서도 룰루로 상대방의 밴 카드를 소모시켜 재미를 봤다.

장용준은 결승 무대에서 ‘환펑’ 탕 환펑에게 완승을 거뒀다. 그리고 우승 확정 직후 진행된 기자 회견에서 자신과 같은 역경을 겪고 있는 프로게이머들, 자신을 믿어준 팬들, 애인과 가족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들이 저를 보고 ‘저랬던 친구도 우승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성과를 거뒀으면 한다.”

“프로게이머로 지내며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다. 그럼에도 응원해주신 팬분들께 감사드린다. 세상이 저한테서 등을 돌렸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끝까지 제 편이 돼줬던 여자친구와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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