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누구인가… ‘오바마의 부통령’에서 최고령 대통령으로

77세 대선 승리…내년 1월 취임하면 78세
6선 상원의원·부통령…44년 동안 워싱턴 중심에
대선 도전 2번 실패…3수 끝에 백악관 차지
아픈 가정사도…첫 부인·1살 딸 교통사고 숨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상원의원 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된 이후인 1972년 12월 12일 의회의사당이 있는 워싱턴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AP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는 1942년 11월 20일 펜실베이나주 스크랜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77세에 미국 대선에서 승리했고, 내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식을 가질 때면 78세가 된다.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다.

바이든 후보는 또 정치적 훈장이면서도 동시에 굴레였던 ‘오바마의 부통령’이라는 닉네임을 벗고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그의 정치경력은 화려하다. 바이든 후보는 6년 임기의 미국 상원의원을 6선이나 역임했고, 이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8년 동안 부통령 자리를 지켰다. 1973년 1월부터 2017년 1월까지 44년 동안 워싱턴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못 이룬 꿈이 있었다. 바로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1988년과 2008년에 대선 출사표를 던졌다가 두 번 모두 예선전 격인 민주당 경선을 완주조차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3수 끝에 미국 대통령에 자리에 오른 것이다.


온건한 중도 성향…미국 역사상 6번째 최연소 상원의원

바이든 후보는 중도 성향으로 분류된다. 온건하고 친근한 이미지도 장점이다. 친화력을 바탕으로 노동자·노동조합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 것도 정치적 자산이다.

바이든 후보는 정당을 떠나 많은 정치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특히 2018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는 깊은 우정을 나눴다. 바이든 후보가 매케인의 지역구였으면서 공화당의 텃밭인 애리조나주에서 이긴 것은 이번 대선의 결정타 역할을 했다. 매케인과의 우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워싱턴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부메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때 묻은 기득권 세력이라는 꼬리표가 대표적이다. “오락가락하고 우유부단하다”는 비판도 있다.

바이든 후보는 1972년 델라웨어주에서 치러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미국 정계 중심에 들어왔다. 그는 30살에 상원의원이 되면서 미국 역사상 6번째 최연소 상원의원이 됐다.

첫 출발은 아이러니와 행운의 합작품이었다. 1972년 상원의원 선거 당시 공화당 현역 상원의원이었던 칼렙 보거스는 델라웨어주에서 하원의원 3선, 주지자 재선, 상원의원 재선을 했던 거물이었다. 보거스가 워낙 세다보니, 민주당에선 출마자가 없었다. 젊은 바이든은 겁 없이 뛰어들었다.

베트남전쟁이라는 시대 상황이 바이든을 도왔다. 바이든은 베트남 미군 철수를 주장하면서 젊은 층과 진보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노동조합도 바이든에 힘이 됐다. 투표함을 열어보니, 바이든이 50.5%의 득표율로, 49.1%의 보거스를 아슬아슬하게 눌렀다.

버락 오바마(오른쪽) 당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직전이었던 2017년 1월 12일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 당선인이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대통령이 미국 시민에게 주는 최고 권위의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받으며 눈물을 보이고 있다. AP뉴시스

6선의 상원의원…오바마의 부통령

바이든은 델라웨어주를 기반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는 상원의원 시절 주로 외교위원회와 법사위원회에서 일했다. 바이든 당선인은 두 차례에 나눠 3년 반 동안 상원 외교위원장을 지냈다. 그가 외교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러나 2002년 10월 미군의 이라크 공격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바이든은 또 1987년부터 1995년까지 8년 동안 상원 법사위원장을 지냈다.

정치인생의 전환점은 오바마 전 대통령을 만난 것이다. 오바마가 상원의원 시절 외교위원회를 선택했고, 당시 위원장이 바이든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바이든은 급부상하는 오바마를 경계했고, 오바마는 바이든을 노회한 인물로 여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거치면서 한 팀이 됐다. 오바마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백인들의 지지를 받는 온건 성향의 바이든을 러닝메이트로 택했다. 이들은 백악관을 차지했다.

바이든은 진보 진영과 흑인들의 지지를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오바마는 올해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바이든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선언하지 않아 바이든의 애를 태웠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1991년 10월 12일, 상원 법사위원원장 시절 성희롱 의혹이 제기됐던 클래런스 토마스 대법관 후보의 청문회를 앞두고 열린 회의에서 제스처를 취하며 발언하고 있다. AP뉴시스

3수 끝 대권 꿈 이뤄…험난했던 민주당 경선

바이든은 1988년과 2008년에 각각 대선 출사표를 던졌다가 중도 사퇴했다. 1988년엔 당시 영국 노동당의 닐 키녹 당수 연설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에 휩싸여 하차를 선택했다. 2008년엔 낮은 지지율이 발목을 잡았다. 경선 개막전이었던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0.9%의 지지율을 기록하자 그날 밤 사퇴를 선언했다.

올해 민주당 경선도 난관의 연속이었다. ‘대세론’ 후보 소리를 들었던 바이든은 민주당 경선 1·2차전이었던 아이오와주·뉴햄프셔주에서 각각 4위와 5위로 처지며 몰락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급진 좌파라는 공격을 받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당 후보가 될 경우 트럼프 대통령에 패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인 민주당 주류가 움직였다. 피트 부티지지 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시장 등 중도 성향 후보들이 줄줄이 경선을 사퇴하고 바이든 지지를 선언했다. 경선 승리는 바이든의 자력이라기보다는 민주당 주류의 작품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1972년 11월 7일 실시됐던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열린 축하 행사에서 바이든(왼쪽)이 부인 넬리아에게 마이크를 넘겨 넬리아가 소감을 밝히고 있다. 넬리아가 안고 있는 아이는 당시 1살 됐던 딸 나오미다. 넬리아와 나오미는 이로부터 한달 뒤인 같은해 12월 18일 교통사고로 숨졌다. AP뉴시스

불행했던 가정사…‘아킬레스건’ 차남 헌터

그는 전형적인 미국의 중간계급 가정에서 자랐다. 부친이 중고차 판매업으로 자리를 잡기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은 서민적 이미지로 롱런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학창 시절에는 말을 더듬어 고생을 했다.

바이든은 시라큐스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였던 바이든은 28세 때 델라웨어주 뉴캐슬 카운티의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평생 몸 바칠 정계에 받을 디딘 것이었다.

바이든은 1972년 첫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뒤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 부인 넬리아가 세 자녀를 데리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갔다가 트럭이 넬리아의 차를 들이받았다. 넬리아와 1살 난 딸 나오미는 숨졌다. 장남 보와 차남 헌터는 중상을 입었다.

바이든은 두 아들의 치료를 위해 상원의원 포기 의사를 전달했으나 민주당 지도부가 만류했다. 바이든은 두 아들을 돌보기 위해 델라웨어에서 워싱턴의 의사당까지 150㎞를 기차로 출퇴근했다. 그는 상원의원 36년 동안 이를 지켰다.

장남 보가 2015년 뇌종양으로 45세에 세상을 뜬 것은 덮을 수 없는 아픔이다. 보는 이라크에서 군 복무를 했고, 델라웨어주 국무장관을 지냈다. 모범적인 아들이었으며 정치적 후계자였다.

바이든은 1977년 지금의 부인 질과 재혼했다. 이들은 딸 애슐리를 낳았다. 보와 달리 차남 헌터는 바이든의 아킬레스건이다. 헌터는 우크라이나 가스회사의 이사로 일했던 것은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관련해 바이든의 약점이 됐다. 헌터로 추정되는 인물이 마약을 흡인하면서 성행위를 하는 동영상이 유출됐다는 보도가 이번 대선 전에 나오기도 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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