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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라이프] 만추(晩秋), 제주를 걷는 사람들

제주 평화로에서 바라 본 가을 산야 전경.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어스름, 한라산 정상으로 가는 성판악 탐방로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다. 11월, 제주의 아침 공기는 부쩍 차가워졌다. 차 댈 곳을 찾는 이들과 주차를 마치고 이제 막 산행 준비를 시작한 이들의 바지런한 몸놀림이 차분히 새벽 공기를 가른다.

이 시각 탐방로 초입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내뿜는 곳은 휴게소뿐이다. 김이 가득 서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등반에 앞서 먹거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안은 분주하다. “김밥 네 줄 주세요. 우리 물 몇 개 사야지?” “여기 해장국 두 그릇이요.”

갑작스레 마주한 활기를 넋 놓고 바라보는 사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허기를 자극한다. 어느 새 사람들 틈에서 은박지에 돌돌 말린 김밥을 사고 다시 휴게소 문을 나서는데, 옷 매무새를 다듬고 출발선에 서자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쩐지 한라산의 기운은 오름을 오를 때의 경쾌함과는 다른, 어떤 거룩한 것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에 더 가깝다. 운명처럼 폭풍처럼 시작될 고된 산행에 앞서 깊은 한숨을 몰아쉬고 아직 해가 들지 않은 한라산 밑자락으로 조심히 발걸음을 밀어 넣는다.

지난 21일 제주 한라산 성판악 탐방로를 걷는 탐방객들.


겨울을 향해 치닫는 11월, 이 무렵의 산행은 조금 특별하다. 한라산의 계절은 털진달래가 만개한 꽃분홍 봄부터 사락사락 한겨울 설산의 풍경까지 어느 하나 무정한 것이 없지만, 이미 단풍이 지고 아직 겨울은 오지 않은 이맘때의 한라산은 자신과의 대화에 오롯이 몰두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때이기 때문이다.

성판악 코스는 탐방로 대부분 구간이 숲에 쌓여 꼬닥꼬닥(‘천천히’를 뜻하는 제주어)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고행의 재미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런 후 정상부인 백록담을 눈앞에 두고 서야 만나게 되는 고지의 절경은 더 큰 환희를 안긴다.

오를수록 세차게 불어오는 한라산의 바람과 저 멀리 아련한 제주 산야의 풍경. 아직 새해를 이야기하기에는 이른 때, 다음 해의 기운을 차근차근 적립하는 소중한 시간인 셈이다.

제주 새별오름의 억새밭에서 방문객들이 가을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늦가을 제주는 어딜 가나 자연을 걷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한라산 탐방로, 제주 속살을 이은 올레길, 은빛 억새 물결이 넘실 대는 수백 개의 오름마다 알록달록 사람들의 걸음 행렬이 새로운 가을 풍경을 빚는다.

매년 입춘 무렵 들불축제가 열리는 제주 새별오름(애월읍 봉성리)엔 하루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 주요 도로(평화로)와 인접해 접근성이 좋은 데다 방송에 여러 차례 노출되면서 가을 낭만을 자극하는 대표 관광지로 사랑 받고 있다.

차를 세우고 민둥산 급경사를 30분 가량 오르면 눈앞엔 시원한 제주 풍경이 펼쳐진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와 바스락바스락 바람 따라 흔들리는 은빛 억새 물결은 보는 것 만으로 그 안에 선 자체로 안식이다.

한라산 정상부 부근. 정상비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긴 줄이 1시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SNS를 통해 개인 일상을 공유하는 문화가 확산하며 생겨난 새로운 풍경이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확산세가 지속되면서 야외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한라산 정상 등반로인 성판악 코스엔 주말에 집중되던 탐방객 수가 주말 주중 구분 없이 계속 이어진다. 제주도가 내년 1월 1일부터 성판악·관음사 코스에 예약탐방제를 적용하겠다고 밝히면서 늦가을 한라산 인파는 더 늘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일상을 올리는 문화가 확산하면서 한라산 백록담엔 정상비 사진을 찍기 위한 긴 행렬이 연출되고 있다. 정상부 사진을 통한 종이 인증서 발급도 계속 늘고 있다.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 제주관광공사 제공

새별오름에서 내려다 본 제주의 가을 풍경.

가을이 깊어갈수록 우리의 감성을 흔드는 건 알록달록 단풍이 아니라 산야에서 솜털 같은 꽃망울을 틔우는 억새와 바람이다.

제주의 자연 곳곳에서, 제주의 마을과 자연을 잇는 올레길 굽이굽이에서 혹은 한라산 정상을 향해 오늘도 걷고 있는 사람들. 걷고 생각하고 걷고 질문하며 이들은 무엇에 답을 찾아가는 걸까.

이미 낙엽은 지고 바닷바람은 최고조에 이른 만추(晩秋). 동면(冬眠)의 시간을 앞두고 빛을 잃어가는 들판의 순리만이 가득한 시각. 지금 제주의 길엔 스스로를 마주하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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