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학교도 가정도 지옥이었다”…청년들이 자신을 가둔 이유[이슈&탐사]

[방에 나를 가뒀다, 은둔 청년 보고서] ② 은둔에 이른 경로

청년이 고통받는 시대, 더욱 한계 상황에 놓인 청년들이 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로 불리는, 스스로를 방에 가둔 청년들입니다. 가족이 쉬쉬하지만 ‘은둔 청년’은 우리 주변에 생각보다 많습니다. 지난해 기준 약 13만명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의 히키코모리처럼 사회 문제가 될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사회에 나오지 못하고 집에 고립되는 청년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일보 취재팀은 은둔 청년 사례 18건을 찾아 당사자와 가족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방 안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6회 시리즈로 전합니다. 시리즈 2회는 왜 이들이 은둔하게 됐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교를 자퇴하고 8년간 은둔했던 스물네 살의 송근재(가명·왼쪽)씨가 지난 5일 서울 성북구 '리커버리센터'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근재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진 극심한 학교 폭력을 피해 방으로 숨어들었다. 최현규 기자

은둔 청년이 방으로 숨어드는 경로는 다양하다. 부모의 학대와 방임, 학교 폭력, 외모와 성적에 대한 열등감 등 여러 요인이 있다. 국민일보 취재팀이 만난 은둔 청년들은 모두 10대에 부정적인 일을 겪었다. 예민한 청소년들은 이후 무력감과 수치심, 불안감에 떨었다. 일부는 등교를 거부하고 바로 은둔을 시작했다. 학교를 겨우 졸업한 뒤 20대에 은둔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청년들은 무섭고 두려운 세상에서 자신의 방으로 피난했다.

가정이 해체된 청년의 선택
스물네 살 이성태(가명)씨는 2년 전 겨울부터 1년 반 동안 경기도 성남의 반지하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계절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그가 외출한 건 머리를 자를 때뿐이었다. 목이 마르면 수도꼭지를 틀어 입을 가져다 댔다. 배가 고프면 라면 봉지를 뜯어 생라면을 과자처럼 씹어 먹었다. 배달시켜 먹고 남은 음식은 썩은 냄새가 날 때까지 놔뒀다. 반지하방은 통풍이 잘 안 돼 한 번 시작된 악취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성태씨는 그곳에서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를 틀어 놓고 시간을 때웠다. 그는 지난 16일 취재팀과 만나 “눈 뜨고 5분 정도 있었던 거 같은데 밤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멍하니 보내니까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 체감이 안 됐다”고 말했다.

성태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가 이혼한 뒤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강원도 한 도시의 시청, 동사무소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했다. 넉넉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아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여러 사업을 하던 이야기를 하셨어요.”

아버지는 친구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순이 된 아버지에게 고혈압이 생겼다.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자 뇌졸중(중풍)이 더해졌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지면서 일을 나가지 못했고, 부자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태씨는 비관적이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잘해보자’ 마음을 먹고 공부를 했더니 전 과목 평균 점수가 63점에서 79점으로 올랐다. “그때는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어요.”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같은 해 아버지가 척추 골절로 쓰러졌다. “고혈압과 뇌졸중이 심했는데 추운 날씨에 뼈 하나가 주저앉으면서 부러졌어요. 하반신 마비가 우려될 정도로 심각했죠. 병원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밤에는 제가, 낮에는 간호사분들이 간병을 했습니다.” 삶이 허무하다는 감정이 중2 나이에 생겼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상황을 겪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어졌습니다. 크게 돈 안 벌어도 단칸방에서 월급쟁이로 게임하고 살자고 생각했어요.”

담임교사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입원시켰고 성태씨는 이듬해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그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뇌졸중이 진행되면서 성태씨는 점차 아버지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게 됐다. 고2가 된 성태씨에게 아버지는 어눌한 목소리로 ‘그래도 널 낳아준 어머니니 나중에 모셔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행방을 알아봤더니 외갓집 근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어머니는 성태씨가 태어날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다.

고3 때 성태씨는 인천에 있는 2년제 대학에 합격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강원도에 혼자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겨울에는 연탄을 날랐고 여름엔 산에서 풀을 벴다. 졸업하고 2년6개월간 가까운 동창도 만나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다. 그가 스무 살이 된 2016년 6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부고를 알리자 어머니는 “아들이 남편을 숨기고 안 보여준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성태씨는 더 고독하고 무력해졌다.

2018년 말부터 일 년 반 동안 은둔형 외톨이로 지낸 이성태(가명·24)씨가 지난 16일 서울 성북구 '리커버리센터'에서 취재팀과 인터뷰하고 있다. 성태씨는 "중학교 때 아버지가 쓰러진 후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다"고 했다. 홍성철 PD

그는 홀로 서기 위해 계속 일했다. 그러나 ‘자리가 잡히면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부담감이 내내 그를 짓눌렀다. 세상과 멀어지고 싶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버텨보기로 하고 2018년 말 은둔을 시작했다. 스스로는 ‘어린 시절부터 계획돼 있던 은둔’이라고 표현했다. “(은둔을 시작할 때는) 나 자신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잊힌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느낌이었어요.”

성태씨는 지난 4월부터 은둔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회적 고립 청년의 회복을 돕는 민간단체 ‘리커버리센터’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중이다. 그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이겨내고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을까.

지워지지 않는 학폭의 상처
1992년생 박기훈(가명·28)씨는 스물네 살이던 2016년 하반기부터 올해 5월까지 3년 반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외출하지 않은 게 아니라 밖에 나가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처음 그런 증상이 나타난 것은 군 전역 후였다. 2015년 1학기에 복학해 학교를 다녔는데 강의실에 들어가면 땀으로 온몸이 젖었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주위에서 ‘원래 그런 거야’라고 했지만 기훈씨 본인은 도서관에 30분만 앉아 있어도 극도의 우울함이 몰려 왔다. “약 먹으면서 버티다가 집 밖으로 나가려는데 심장마비가 올 것 같았어요. 도저히 못 나가겠더라고요.”

기훈씨는 3~4개월 휴식기간을 가진 뒤 이번에는 아르바이트에 도전했다. 주유소 세차장에서 일했는데 증상은 더 심해졌다. “다음 날 일 나갈 생각을 하면 저녁마다 비명을 질렀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일하기 싫어하고 출근하기 싫어하지만 제가 느낀 감정은 그것과 달랐어요. 정말 죽을 것 같더라고요.”

기훈씨는 다시 3개월간 쉬다가 에어컨 설치 보조 아르바이트에 나섰지만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2016년 1학기 다시 학교에 나갔지만 또 실패하고 휴학했다. 다시 3개월간 휴식기간을 갖고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3개월 정도 했는데 ‘만신창이’가 됐다.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고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어요. 집에서 쉬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은둔은 이때 시작됐다.

기훈씨에게 ‘군생활이 불안한 증세에 영향을 미쳤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동문서답처럼 ‘중학교 시절’을 이야기했다. “제가 친구들이랑 술, 담배를 하다 보니 안 좋은 형들을 만나기도 했고 그러면서 폭력을 당하게 됐어요.” 학교의 ‘일진’ 무리는 기훈씨와 친구들을 ‘담배셔틀’로 찍고 매주 돈과 담배를 가져오라고 했다. 기훈씨는 하루 용돈인 1000원으로 도저히 상납금을 충당할 수 없었다. 빈손으로 가는 날 그의 뺨은 맞은 자국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중3 때는 조별 과제를 하기 위해 한 친구 집에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조원 4명 중 2명이 그의 옷을 벗기고 신체 주요 부위를 동영상으로 찍었다. 하지 말라고 저항했지만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은 다음 날 학교에서 그 영상을 돌려봤다.

기훈씨는 늘 불안감을 안고 학교에 다녔지만 부모나 교사에게 이를 알리지 못했다. 7살 때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는 생계 유지를 위해 늘 바빴다. “누군가 개입하면 (괴롭힘이) 오히려 더 심해질 것 같았어요. 집도 편히 쉴 곳이 못 됐죠.” 기훈씨는 학교가 너무 싫어져 수업을 빠지는 날이 많았다.


일부러 먼 곳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심부름했던 애’라는 소문 탓인지 괴롭힘은 이어졌다. 그는 ‘나를 괴롭힌 애들보다 성공하겠다’는 복수심에 공부에 집착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반 친구들이 그가 책상에 엎드려 자는 사이 허벅지를 샤프로 찔렀다. 책을 숨겨놓거나 창밖으로 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훈씨는 이를 버텨내고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합격했다. 하지만 중·고교 시절 폭력의 기억 탓에 대학에서도 친구 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다. 늘 다른 사람의 눈치만 보고 진심 어린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다. 결국 도피하듯 군대에 갔다.

기훈씨는 지난 5월부터 집에서 나와 리커버리센터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약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세상으로 나갈 자신은 없다. “저를 나약한 사람으로 취급해도 이해합니다. 제 상태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다만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저 자신도 잘하는 게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습니다.”

고교를 자퇴하고 8년간 은둔한 송근재(가명·24)씨에게도 학교 폭력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근재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의 이직으로 이사하면서 낯선 도시로 전학했다. 중학교 1학년 첫 수련회에 가는 버스에서 한 친구와 싸웠고, 이는 같은 반 ‘질이 안 좋은 아이들’의 괴롭힘으로 이어졌다. “이유 없이 저를 밀치고 분필가루, 지우개가루를 던졌어요. 나중에는 주먹으로 때리고 목을 졸랐습니다. 화장실에 가둬놓고 문을 열어주지 않은 적도 있어요.”

괴롭힘은 중학교 3학년까지 이어졌다. 근재씨는 등굣길에 다른 학생을 피해 멀리 돌아갔다. 평소 15분 걸리는 등교 시간이 20분, 25분으로 늘어났다.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지 않고 화장실, 도서관으로 도망을 갔다. 담임교사에게 말했지만 적극적인 조치는 없었다. 너무 고통스럽고 답답해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했지만 어설픈 방법을 택한 덕에 살았다.

그는 점점 사람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타인을 만나면 목 뒤가 딱딱하게 굳어지고 머리가 아팠다. 고등학교는 일부러 먼 곳으로 갔는데 이미 대인기피증이 생긴 뒤였다. 종일 엎드려 있었고 급식실에도 가지 못했다.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8년간 주로 방에 숨어 있었다. 그는 아직도 낯선 사람을 보면 긴장된다. “인상이 무서워 보이거나 제 또래 사람들을 만나면 지금도 되게 떨립니다.”

은둔의 씨앗이 된 가정불화
고교 1학년 때 자퇴하고 은둔을 시작한 김기윤(가명·25)씨에게 ‘왜 은둔하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가정 문제가 가장 컸던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장애가 있는 어머니를 자주 때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옆집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행패를 부렸다. 기윤씨는 그 모습을 보고 많이 울었지만 달래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방치하는 느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어렸을 때는 밝은 아이였던 것 같은데 환경 때문에 내성적으로 변한 것 같아요.”


중학교는 농구를 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졸업할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에선 적응이 힘들었다. 첫 2개월 동안 학교에 잘 안 가니 자퇴 처리가 됐다. “학교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어요. 자퇴하고 나서도 갈 데가 없으니 집에만 있게 됐죠.” 기윤씨는 지난해 3월부터 은둔형 외톨이 청년의 회복을 돕는 사회적기업 K2인터내셔널코리아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

9년간 은둔 생활을 한 정선우(가명·26·여)씨도 ‘가정환경’을 자신이 은둔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선우씨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어머니를 폭행했고, 어머니는 악을 쓰며 다퉜다. 아버지는 종종 극단적 선택을 하겠다는 암시를 했다. 아버지가 방에서 홀로 문을 잠그고 있으면 선우씨는 불안에 휩싸였다. “아빠가 잘못됐을까 봐 불안해서 문을 두드려보고 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생활비를 쥐꼬리만큼 주고 본인의 취미생활만 즐긴다’는 불만을 선우씨 앞에서 토로했다. 선우씨 부모는 그가 중1 때 이혼했다. 선우씨는 아버지 집과 어머니 집을 오가며 살았다. “부모님한테 방치된 채 살았다고 생각해 원망과 분노가 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을 간 경남의 한 학교에서 학교 폭력을 당한 선우씨는 그 후로도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는 끔찍하고 힘든 곳이었고,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 불편하고 불안했다. 그는 고1 때 자퇴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고 포기하고 싶었어요.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내 인생이 괜찮아질 거야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은둔의 삶은 기대와 달랐다. 무력감이 몰려오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잦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고 밖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소모되는 느낌이었어요. 스스로에게 ‘너는 죽어버려’ 같은 모진 말을 하면서 상처를 줬습니다.” 선우씨는 은둔 9년째인 올해 여름 용기를 냈다. 현재 서울에서 다른 은둔 청년들과 집단생활을 하며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6개월간 방 안에만 있었던 안일석(가명·19)씨도 은둔의 가장 큰 이유로 어머니를 들었다.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는 것보다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중시했다. 감정 기복이 심해 자식들에게 잘해주다가도 갑자기 욕설과 험담을 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일방적으로 폭언을 퍼붓는 일이 많았다. 중학교에서 왕따 문제로 마음고생을 하다 어머니에게 털어놨더니 ‘누나들은 학교생활 탈 없이 하는데 너만 왜 그러느냐’는 말이 돌아왔다. 일석씨는 “정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지난해 고3이던 일석씨는 지방의 기능대 전기과에 합격했다. 본인은 인문계열 학과 진학을 원했는데 어머니가 ‘기술을 배워 취직하라’며 진학을 밀어붙였다. 입학일이 다가오면서 일석씨는 불안해졌다. “적성에 맞지 않는데 경쟁자들 사이에서 공부할 수 있을까, 너무 불안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으니 몇 개월 동안 다른 걸 알아볼게요. 좀 봐주세요’라고 말했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욕설과 험담, 한숨이었다. 결국 일석씨는 어머니가 없는 방 안으로 숨는 길을 택했다.

“더 잘하고 싶었는데…”
2000년생인 문세훈(가명·20)씨는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처음 은둔을 시작했다. 그가 다니던 중학교는 지역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곳이었고, 세훈씨는 학급에서 반장이었다. 1학기 중간고사가 다가오는데 준비가 안 됐다고 느꼈다. ‘같은 반 아이들한테 잘 보여야 하는데…’ 시험을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에 세훈씨는 학교에 아예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형을 시켜 그를 강제로 학교에 보내려고 했다. 몸싸움까지 일어났지만 가족들은 세훈씨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은둔형 외톨이 송근재씨가 지난 5일 서울 성북구에서 사진기자의 요청으로 잠깐 외출해 거리를 걷고 있다. 최현규 기자

세훈씨는 “처음에는 죄책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곧 종일 집에 있는 생활이 익숙해졌다. 나중에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워졌다.

이듬해 세훈씨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대안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적응을 못했다. 왜 그런 것 같으냐는 질문에 세훈씨는 “몸집이 작아 무시를 당했다”고 말했다. “키도 작고 말랐으니까요. 동생들도 저를 형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때 외모 콤플렉스가 생겨 키가 크고 잘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안학교는 결국 한 학기만 다녔다. 어머니는 등교를 거부하는 그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켰다. 한 달 후 학교에 가겠다고 약속하고 병원에서 나왔지만 세 번째 중학교는 하루만 다녔다. 다시 은둔 생활 등을 거쳐 지금은 경기도의 한 단기 청소년쉼터에서 지내고 있다.

세훈씨는 다음 달 허벅지를 늘려 키를 크게 하는 수술을 할 예정이다. 이미 한 차례 키 수술로 168㎝가 됐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세훈씨는 “저는 자신감을 외모에서 찾는다”고 말했다. “키가 작으면 남자로 보이지도 않잖아요. 덩치 크고 잘생기면 인기도 많고 자신감도 생길 거 같아요.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를 보다 보니 잘생긴 것에 대한 갈망이 커졌어요.”

어머니 박모(50)씨는 세훈씨가 대안학교에서 잠깐 다이어트에 성공해 주위의 관심을 받고 나서부터 외모에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애는 ‘집을 팔고 대출을 받아서라도 성형수술을 해 달라’는 수준이에요. 저로서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1997년생인 윤성규(가명·23)씨는 고교 졸업 후 4년 넘게 은둔 생활을 했다. 어머니 김모(50)씨에 따르면 얌전하고 성적도 상위권이던 성규씨가 돌변한 건 고2 때였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성규씨가 해 달라고 해 두 달간 과외를 시켰다. 그리고 시험을 봤는데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원하는 대학이 아니면 차라리 취업하겠다’면서 공부를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동안 하지 않던 지각을 했고 이후 치러진 시험에서 백지 답안지를 냈다. 3학년 2학기 때는 아예 학교에 나가지 않는 날도 많았다.

어머니는 성적 경쟁과 사교육을 시키기 어려운 집안 형편이 성규씨를 좌절하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다닌 학교는 성적순으로 학생을 나눠 자율학습을 시켰다. “일본 자료를 보니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삶을 사는 아이들이 은둔에 많이 노출된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아이도 공부를 잘했고 본인 욕심이 있어서 스스로에게 기대를 많이 했었나 봐요.”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

[방에 나를 가뒀다. 은둔 청년 보고서]
▶①‘옆집 애도 그렇대’ 히키코모리 국내에도 13만명[이슈&탐사]
▶③매일 스스로를 저주한 은둔의 밤…행복은 오지 않았다[이슈&탐사]
▶④“얘야, 대체 왜 숨었니” 아들의 침묵에 엄마도 무너졌다[이슈&탐사]
▶⑤“50대 은둔 내딸, 나 죽으면…” 공멸의 공포, 8050리스크 [이슈&탐사]
▶⑥“네 탓이 아니야” 믿음, 지지, 국가대책이 은둔 탈출 키워드[이슈&탐사]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