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돈자, 아니 둘시네아와 돈키호테의 순간들[인터뷰]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알돈자 역의 배우 김지현

알돈자는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가진 것 없고 배운 적 없는 여인은 초라한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삶을 숙명으로 여겼다. 어느 날 알돈자는 미친 노인(돈키호테)을 만난다. 자꾸만 자신을 고귀한 이름의 ‘둘시네아’라고 부르는. ‘미친 노인이 하는 미친 말이겠지’하면서도 마음이 요동쳤다. 정말 둘시네아로 살 수 있을까. 하지만 혼란이 싫었다. 돈키호테가 평탄한 (줄 알았던) 삶을 망가뜨리는 것 같았다. 돈키호테의 죽음 앞에 선 알돈자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때 돈키호테의 시종 산초가 알돈자를 부른다. “알돈자!” 그가 답한다. “제 이름은 둘시네아예요”. 태어날 때부터 창녀의 인생을 부여받았다고 믿었던 한 여인의 세상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알돈자 역을 맡은 배우 김지현이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 앞서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알돈자를 연기하는 배우 김지현은 최근 국민일보와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나 “이 대사를 할 때 우주가 확장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잔상이 오래 남았다”는 말에 “휴, 다행이에요”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알돈자가 자신을 둘시네아라고 소개하는 일은, 인생을 포기한 채 살았던 한 여자가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턱을 위로 치켜들고 선언하듯 내뱉었죠.”

‘맨 오브 라만차’는 지난해 12월 18일 개막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세 차례 연기한 뒤 46일 만인 2월 2일 무대에 올랐다. 세기의 소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1965년 뉴욕에서 초연했고, 국내서는 2005년 ‘돈키호테’라는 제목으로 첫선을 보였다. 올해는 한국 초연 15주년으로 시즌 아홉 번째 공연이다. 신성 모독죄로 감옥에 끌려온 세르반테스가 죄수들에게 이룰 수 없는 꿈을 좇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액자식 구성이다.

'맨 오브 라만차' 공연 속 알돈자 김지현의 모습. 오디컴퍼니 제공

김지현은 세 명의 알돈자 중 유일한 신입이다. “제 역량을 의심하게 되는, 자꾸 질문하게 되는 작품이었어요. 관객 한 분 한 분께 희망을 전하는 작품이 되면 좋겠어요.”

김지현은 연극 2004년 ‘미생자’로 데뷔해 ‘그날들’ ‘풍월주’ ‘모래시계’ 등 주로 창작 작품 무대에 올랐다. 2019년 뮤지컬 ‘스위니 토드’로 대형 공연 주연을 꿰찬 후 올해 ‘맨 오브 라만차’를 만났다.

김지현은 이입이 빠른 영민한 배우다. 무대 밖에서도 그는 알돈자였다. 내내 돈키호테를 ‘기사님’으로 칭했고, 그의 죽음을 떠올릴 때는 “아, 알돈자는 정말…”하며 울먹였다. 돈키호테가 알돈자에게 손을 내민 순간을 떠올릴 때는 벅차 보였다. 날이 선 알돈자가 “당신도 뻔하잖아, 나한테 대체 원하는 게 뭐야?”라고 악을 쓰자 돈키호테가 답한다. “그대를 구하는 일이오.” 김지현은 “기사님의 일방적인 다짐이 아니라 알돈자와의 관계성이 담긴 말이라 의미가 있다”며 “처음에는 ‘당신이 뭔데 나를 구하지?’라는 의문이 들었다가 나중에는 마음에 파도가 쳤다”고 말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알돈자 역을 맡은 배우 김지현이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 앞서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경력직 알돈자들과의 차별점을 묻자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무언가를 다르게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그저 이 작품을 잘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고민은 호연으로 이어졌다. 연극 ‘오만과 편견’ ‘스피킹 인 텅스’, 뮤지컬 ‘러브레터’ 등에서 경험한 1인 다(多)역은 알돈자의 입체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자양분이 됐다. 그는 “모든 작품이 다 어려웠다”며 “(알돈자처럼) 한 명의 캐릭터가 여러 번 내적 변화를 겪는 것보다 각각의 인물을 혼자 연기하는 것이 더 편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알돈자는 지금 잘살고 있을 것 같냐”고 묻자 망설임 없이 “그럼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알돈자가 놓인 상황 자체가 달라지진 않았겠죠. 하지만 스스로 존중하고, 또 존중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건 기사님과의 약속이니까요.”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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