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밤이 싫었던 ‘헤나’ 박증환


프레딧 브리온 원거리 딜러 ‘헤나’ 박증환은 스무 살 때까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집안 환경상 밤늦게까지 게임을 할 수 없었던 그의 솔로 랭크 소환사명은 ‘밤이 싫어’였다. ‘헤이트 나이트(Hate Night)’, 각 단어의 맨 앞 음절만 딴 두 글자가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고 나서야 밤늦게까지 원없이 게임을 했다. 공부를 소홀히한 대신 솔로 랭크 티어가 수직으로 상승했다. 금세 챌린저에 도달했다.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는 ‘1년만 도전해보고 안 되면 접겠다’는 각오로 휴학계를 냈다.

2019년 스프링 시즌 오피지지 입단 테스트에 붙어 처음으로 선수가 됐다. 팀의 와해로 데뷔를 하지는 못했다. 서머 시즌 스피어 게이밍에 입단해 ‘LoL 챌린저스 코리아(챌린저스)’ 무대를 밟았다. 프로 출신 선수들과 붙어보니 그들이 생각만큼 ‘넘사벽’은 아니란 느낌을 받았다.

“피지컬 싸움에선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대신 소위 ‘뇌지컬’이라고 하는 게임 이해도 측면에서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당시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게임을 했다. 예를 들면 1레벨부터 무작정 라인을 쳤다. 나중에 보니 전부 상대가 유도한 플레이에 걸려든 거더라. 갱킹에 취약해지는 라인을 스스로 만들고 있었던 거다.”

그는 2020년 브리온 블레이드에 입단했다. 최명원 감독은 오피지지 시절부터 박증환의 잠재력을 높게 봤다. 박증환은 브리온에서 선배 선수들의 라인 관리, 정글 시야 확보 요령, 상대 심리 읽기 등을 어깨너머로 배워나갔다. 주전과 후보를 오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마침내 프로게이머로서 정돈된 1년을 보냈다.

“오피지지부터 브리온에 이르기까지 공백기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반 시즌이라도 쉬게 된다면 바로 군에 입대하려고 했다. 프로게이머 생활을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까. 성공 가능성이 적어 보였다. 그런데 꼴찌로 시작했다가, 다음 시즌엔 챌린저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조금만 더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계약이 종료되고 또 성사되는 11월은 e스포츠 업계에서 가장 잔인한 달이다. 작년에는 더욱 그랬다.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는 프랜차이즈 리그로 새롭게 출범했고, 게임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규모 리빌딩을 진행했다. 유달리 많은 선수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브리온도 기존 선수들과 계약을 종료하고 새 판 짜기에 들어갔다.

“팀이 리빌딩 절차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 또한 이 팀에 남을 수 없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재작년과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는 팀을 못 구하면 정말 이 꿈을 포기하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반 시즌을 쉬면서까지 계속 이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솔로 랭크 등수는 꽤 높았지만 스스로 실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예감은 적중하지 않았다. 그는 브리온에서 홀로 2년차를 맞게 됐다. 박증환을 팀에 남긴 건 새로 부임한 최우범 감독의 결정이었다. 삼성 갤럭시 시절부터 선수에게 필요한 자세로 간절함, 성실함을 유독 강조해왔던 최 감독이다. 그는 박증환의 많은 연습량, 바른 생활 태도 등을 보고 입단 테스트를 제의했다.

“명절 연휴 동안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혼자 숙소에 남아서 솔로 랭크 연습을 했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집에서는 밤늦게까지 게임을 못 하니까. 그런데 감독님께서 그런 내 모습을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입단 테스트를 제의해주셨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솔로 랭크 게임 판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작년에만 2500~3000판을 했다. 사실 입단 테스트에서도 특별히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진 못했다. 그런데 감독님께선 내가 끈기 있게 게임 하는 모습, 열심히 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박증환은 LCK 리거, 그것도 10명의 주전 원거리 딜러 중 하나가 됐다. 프레딧은 봄 동안 5승13패(세트득실 –15)를 기록했다. 결과적으로는 꼴찌인 10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애초 이들이 받았던 기대보다는 많은 것을 이뤘다. 특히 ‘디펜딩 챔피언’ 담원 기아를 꺾은 사건은 전 세계 리그의 스프링 시즌을 통틀어도 최대 이변으로 꼽힐 만했다.

“시즌 개막 전 스크림 성적이 좋았는데, 막상 시즌 개막 후엔 2연패를 당해 기세가 완전히 꺾인 상황이었다. 담원 기아를 꺾자 사라졌던 자신감이 다시 생기더라. 시즌 막바지 멘탈 관리에 실패하고, 정신적으로 지쳐버린 게 너무 아쉬웠다. 마지막에 조금만 더 열심히 했다면 플레이오프까지 갈 수 있었는데…. ”

그의 말대로 프레딧은 2라운드 후반부터 힘이 쭉 빠졌다. 박증환에게 1옵션을 맡기는 ‘바텀 캐리’ 전략 외에는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게 드러났다. 선수들은 서서히 자신감을 잃었고, 시즌 마지막 3경기를 전부 졌다.

“일부러 바텀 캐리만 추구한 건 아니었다. 스크림과 실전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전략을 시도해봤다. 선수단도 원 패턴 팀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캐리 패턴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결국엔 자연스럽게 바텀 캐리가 되더라.”

“‘엄티’ 엄성현이 없었다면 우리는 더 힘든 시즌을 보냈을 것이다. 성현이가 경기 안팎으로 팀의 분위기를 잘 잡아줬다. 덕분에 팀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성현이가 나와 동갑인데도 형 노릇을 많이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젠지전 2세트에서 트리스타나로 캐리했을 때다. 나는 원거리 딜러 중 ‘룰러’ 박재혁 선수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상대로 게임을 캐리해서 더 기억에 남는다. 연패에서 탈출해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박증환은 스프링보다 나은 서머 시즌을 자신했다.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첫 번째 목표로 설정했고, 두 번째로는 첫 연승 달성을 설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감을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봤다.

“예전에는 LCK의 벽이 정말 높다고 생각했다. 막상 부딪쳐보니 평생 넘지 못할 벽은 아닌 것 같다. 피지컬로는 전부 경쟁할 만하다 싶었다. 문제는 뇌지컬이다. 경기 리플레이를 많이 돌려봤다. 경험 많은 선수들이 정말 영리하게 게임을 하더라.”

“‘데프트’ 김혁규 선수가 귀환 타이밍을 센스 있게 잘 잡는다. 심리전에도 강하다. 무엇보다 정글러 케어 없이 성장을 잘 해내는 게 가장 신기했다. 박재혁 선수의 바텀 게임 폭발력도 정말 발군이었다. ‘고스트’ 장용준 선수와 붙어보면 그가 정말로 똑똑한 선수란 느낌을 받게 된다. 상대방의 심리를 정말 잘 읽는다.”

게임을 못 해 밤이 싫었던 고등학생은 이제 밤마다 수십만 명의 시청자 앞에서 게임을 한다.

“이제는 ‘1년만 더 해보자’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신 ‘더 열심히 노력해서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나는 게임이 정말 재미있다. 지금 원거리 딜러하면 떠오르는 선수들이 있지 않나. ‘룰러’ ‘데프트’ ‘고스트’…. 그들과 함께 ‘헤나’가 거론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더 다재다능한 팀으로 거듭나 올여름엔 반드시 플레이오프에 가겠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