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女축 대표 미드필더 이영주 “인천 바다 노을 보며 듣는 노래는…”

[플레이 리스트] ④ 여자축구 인천 현대제철·국가대표 미드필더 이영주

인천 현대제철의 국가대표 미드필더 이영주가 3일 인천 서구에 위치한 소속팀 클럽하우스 라커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천=윤성호 기자

짙푸른 바다가 어느 순간 선홍빛으로 깊게 물든다. 꽃잎을 짓이긴 듯 온통 진득한 붉은빛이다. 여자축구 WK리그 인천 현대제철과 국가대표 미드필더 이영주(29)는 마음이 복잡할 때면 캠핑 의자를 챙겨 해넘이 명소인 인천 정서진을 찾는다. 노래를 들으며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가슴 속 생채기가 차츰 아문다.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영주에게 올해는 상처로 남을 해다. 지난 4월 도쿄올림픽 지역 예선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그를 포함한 대표팀 선수들은 몸을 던져 뛰었으나 결국 사상 첫 올림픽행을 이루지 못했다. ‘지소(지소연)’ ‘조소(조소현)’ 언니 등 여자축구 황금세대와 함께하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 더 아쉬웠다.

노을과 함께 이영주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건 그가 평소 즐겨듣는 음악이다. 김광석과 이문세부터 트렌디한 팝송, 발라드에 이르기까지 듣는 분야가 다양하다. 국민일보는 지난 3일 이영주와 만나 그가 좋아하는 음악과 축구 이야기를 들었다. 인천 앞바다가 멀지 않은 현대제철 클럽하우스에서였다.

“‘이등병의 편지’ 들으며 울었어요”

이영주에게 따라붙는 수식 중 한 가지는 ‘여군 축구선수’다. 그는 2013년 국군체육부대 구단인 보은 상무에서 부사관으로 WK리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여자 선수들은 WK리그 드래프트에서 상무에게 지명받으면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사실상 강제 부사관 입대를 해야 했다. 이영주도 같은 경우다.

그는 드래프트에서 상무에 지명받던 순간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옆에 계신 부모님 마음이 상할까 해서 참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무 출신 선배들이 열어준 ‘환영식’에서 그는 평소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을 들이붓고 펑펑 울었다. 언니들이 그때 추천해준 노래가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다.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그날 술 마시고 나서 화장실 변기 붙잡고 엉엉 울었어요. 잘 다녀오라는 언니들한테 ‘저 못 갈 거 같아요’하면서요.” 훈련소와 부사관 학교에 머무른 약 5개월 동안은 그나마 좋아하는 노래도 들을 수 없었다. “위안되는 노래는 군가밖에 없었죠. 지금도 들으면 생각나긴 하겠지만 이제 곧장 기억은 안 나요, 하하하.”

이영주가 입대한 지 3년 뒤인 2016년부터 상무는 드래프트 대신 자원입대자만 선수로 받기 시작했다. 현재 대표팀과 현대제철에서 함께 뛰는 동료 최유리가 입대를 거부해 여자축구계에 한 차례 파동이 일면서다. 하필이면 이영주가 제대하는 해였다. 이영주는 아직 예비역 하사다. 대뜸 군번부터 묻는 그의 질문에 어색함이 없었던 이유다.

잡식성 감성 리스너

인천 현대제철의 국가대표 미드필더 이영주가 3일 인천 서구에 위치한 소속팀 클럽하우스 라커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천=윤성호 기자

좋아하는 노래를 묻자 먼저 “이문세 선생님 노래를 좋아한다”는 답이 나왔다. 개중 즐겨듣는 건 ‘소녀’와 ‘옛사랑’이다. 저녁노을을 좋아하는 그가 ‘노을 진 창가’와 ‘텅 빈 하늘 밑 불빛’을 노래한 곡을 좋아하는 것도 우연은 아녀 보였다. 마냥 발랄할 것이란 짐작과 달리 가까이서 본 그의 성격은 오히려 남들보다 차분하고 감상적인 편이다.

‘이등병의 편지’를 부른 김광석도 그가 좋아하는 가수다. 우리 나이 서른을 맞기 전부터 ‘서른 즈음에’를 즐겨들었고, 대표곡 ‘사랑했지만’도 자주 찾는다. 그는 “(선수단에) 노래 취향이 통한다 싶은 사람이 잘 없다. 치료실에서 노래를 틀면 ‘누가 틀었냐’ ‘언니 이런 노래 들어요?’ 소리가 나올 것 같다”면서 “그래서 뒤에서 몰래 듣는다”고 웃었다.

예전 노래만 듣는 건 아니다. 요즘에는 영국의 일렉트로닉 팝 듀오 혼(HONNE)에 빠져 있다. 이들이 부른 ‘데이 원(Day 1)’, ‘웜 온어 콜드 나이트(Warm On a Cold Night)’를 즐겨듣는다. 가수 혁오가 부른 ‘톰보이(TOMBOY)’도 가사를 좋아해서 자주 듣는다. 청춘이 겪는 불안과 사랑을 읊은 서정적 노랫말이다. 그는 “예전 노래만의 감성도 좋고, 요즘 노래도 나름의 느낌 있는 곡을 좋아한다”고 했다.

혼자서도 노래방에 가는 걸 좋아하는 그에게 코로나19는 유독 힘들다. 이영주는 “학생 시절부터 스트레스 받으면 학교 앞 노래방에 오천원 짜리를 들고 가서 목쉴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면서 “동료 선수들과도 노래방을 자주 갔다. 상무에 있을 때도 부대에 노래방에 있어서 가곤 했다”고 말했다. ‘블루밍’을 포함해 아이유의 노래는 가리지 않고 부른다. 가수 김나영이 래퍼 MJ와 부른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이’도 좋아한다.

운이 좋은 선수

인천 현대제철 이영주(왼쪽)가 2019년 11월 26일 용인시민체육공원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아시아축구연맹 주관 여자클럽챔피언십 경기 중 멜버른 빅토리를 상대로 득점한 동료 따이스를 축하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처음 축구를 하려 마음먹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올해가 딱 20년째다. “원래는 운동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체육 시간도 별로 안 좋아했고요. 그런데 마침 학교에 있던 여자축구부가 축구하는 걸 보면서 이상하게 끌리더라고요.” 부원 모집 공고가 뜨자 어머니에게 찾아가 해보고 싶다며 졸랐다. 여자축구 대표 미드필더 이영주가 탄생한 건 그런 우연도 따라준 결과다.

그는 체구가 작지만 악바리였다. 초등학교 시절 그와 함께 뛴 권예은 WK리그 해설위원은 “영주는 그때 키가 140대 정도로 작았는데도 근성이 대단했다. 언니들과 짝지어서 훈련해도 절대 안 지려고 했다”고 회상했다. 이영주도 “축구부에서 제일 작아서 맨 끝에 서곤 했던 게 기억난다. 승부욕이 세서 미니게임에서 지면 울었다”며 웃었다.

한국에서 여성이 축구선수로 성장하는 건 가시밭길이다. 그는 자라며 부모의 반대와 열악한 환경, 사회 인식 탓에 기량과 상관없이 축구화를 벗는 동료를 수도 없이 목격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태극마크를 달만큼 돋보였던 그 역시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축구부 해체가 확정되며 고비를 맞았다.

학교마다 주전이 확고한 3학년 시기에는 새 팀에 적응하기도 힘들뿐더러 규정상 학생선수들은 전학을 가면 이전 소속팀이 완전히 해체되지 않는 이상 3~6개월 간 출전이 금지된다. 다행히 고교 축구부가 그를 미리 눈여겨본 덕에 진학에 성공,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스스로를 “운이 좋았다”고 설명했다.


잔잔하지만 기억에 남는 발라드처럼

인천 현대제철의 국가대표 미드필더 이영주가 3일 인천 서구에 위치한 소속팀 클럽하우스 라커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천=윤성호 기자

이영주는 지난해 발목 부상을 당해 수개월 간 회복에 전념했다. 때문에 본래대로 지난해 중국과의 도쿄올림픽 지역 예선 최종 플레이오프가 열렸다면 뛸 수 없었다. 코로나19로 경기가 1년 연기된 게 그에게는 외려 전화위복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잡은 기회를 놓친 것이라 아쉬움이 더 크다.

그는 한국 여자축구의 도약을 가로막는 건 더이상 실력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문화 차이라고도, 한국적인 교육방식이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거예요. 막연하다 여기실 순 있지만 그 작은 하나만 깨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주눅 들고 기죽어서 열심히 하는 데 선수들이 익숙해요. 바꾸려고 하지만 십수 년 몸에 밴 걸 바꾸기가 쉽지 않죠.”

대표팀의 콜린 벨 감독이 선수들로부터 신뢰받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영주는 “외국 선수들은 지도자가 가르치면 자기 주장이 있고 반박도 하는데 한국 선수들은 다 흡수하려 한다. 그게 당연하다고 알고 자랐다”면서 “자신감을 주거나 스스로를 향한 믿음을 키워주는 코칭을 받은 경험이 없다”고 했다. 그는 “(콜린 벨) 감독님이 오고 나서 그런 점을 선수들에게 많이 지적했다. 오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에서 대표팀에 소집된 이영주(오른쪽)가 콜린 벨 감독과 훈련하는 모습. 대한축구협회 제공

만 29세에 불과한 이영주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남았다. 그는 8일 발표된 대표팀 소집 명단에 올랐다. 내년 2월 아시안컵을 대비하는 소집 훈련이다. 아시아에는 일본과 중국 등 세계 최고 수준 팀이 있어 우승이 쉽지는 않다. 다만 이영주는 전보다 선수들에게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경기에서 다 이기진 못했지만, 그래도 요즘엔 맞붙으면 전과 다르다는 걸 느낀다. 신기할 만큼 ‘되겠다’ 싶은 마음이 쌓였다”고 말했다.

즐겨듣는 잔잔하고 감성 충만한 노래들처럼, 이영주는 선수 생활 동안 화려하진 않아도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려 한다. 주 포지션이 공격적인 동료를 뒷받침하는 수비형 미드필더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히든 플레이스 같은, 숨은 맛집 같은 선수가 되자고 생각해요. 크게 드러나진 않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없으면 다른 선수가 빛나지 않는 선수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인천=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