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흰색선만 흐릿… 구로 ‘무늬만 횡단보도’ 사건

지난 6월 교통사고가 발생한 서울 구로구 내 횡단보도의 모습. 경찰은 교통 시설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사실상 횡단보도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던 것으로 판단했다. 박민지 기자

경찰이 교통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횡단보도가 오랜 기간 방치돼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횡단보도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 횡단보도에서의 교통사고는 12대 중과실에 해당되는 만큼 경찰의 최종 판단에 따라 향후 비슷한 사건에서 처벌 수위가 달라질 수 있다.

서울 구로경찰서는 지난 6월 한 횡단보도에서 발생한 보행자와 차량 간 접촉사고를 조사하면서 사고 횡단보도가 유명무실하고 등록되지 않아 횡단보도로 볼 수 없다고 잠정 결론지은 것으로 17일 확인됐다. 반면 피해자는 사고 발생 장소가 횡단보도인 만큼 중과실에 해당한다는 입장이다. 현행법상 12대 중과실 교통사고는 횡단보도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 음주운전, 어린이보호구역 안전운전의무 위반, 중앙선 침범 등이 포함된다. 중과실 교통사고는 형사처벌 대상이다.

사고가 발생한 곳은 신호등은 없지만 횡단보도 모양의 흰색 구분선이 바닥에 그려져 있다. 다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뚜렷하진 않았다. 구로서는 사고 이후 서울시교통안전시설물관리시스템(T-GIS)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고 지점이 공식 횡단보도가 아니라고 봤다. 구로서 관계자는 “조회가 안되는 횡단보도를 공식 교통시설물로 인정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또 등록 여부를 떠나 횡단보도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게 구로서의 입장이다. 횡단보도가 차량이 자주 드나드는 골목 입구에 있고, 운전자가 횡단보도를 인식할 수 없을 만큼 관리가 안 돼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구로서로부터 해당 내용을 통보 받은 후 ‘등록 안 된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중과실 사고로 인정받지 못할 것 같다’며 관할 구청에 민원을 접수했다. 민원을 접수한 구로구청은 경찰과 달리 “공식 절차를 거쳐 설치한 횡단보도가 맞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7년 도입된 T-GIS를 개편하면서 누락된 데이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청 관계자는 “등록돼 있지 않다고 횡단보도의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구로서는 사건 발생 직후엔 관할 구청에 횡단보도 등록 철회를 요청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것을 고려해 일단 T-GIS에 등록하고 시민 안전을 위해 횡단보도 보수를 진행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또 중과실 인정 여부에 대해서도 추가로 검토하고 있다.

한문철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는 “횡단보도 인정 여부를 두고 다투는 교통사고의 선례가 될 것”이라며 “어떤 과정을 밟아 설치했는지, 횡단보도로 인식되는지 등이 쟁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횡단보도 인정 여부가 쟁점이 된 매우 드문 사례”라며 “중앙선이 폭설에 가려진 상황에서 벌어진 사고가 중과실로 인정받지 못했던 판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해당 사건도) 중과실 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