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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상의 세상만사] 그루밍 피해, 남의 일 아니다


그루밍(Grooming)은 ‘길들이다’라는 뜻으로 아동이나 청소년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성적으로 착취하는 범죄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주로 취약한 환경에 놓인 아동이나 청소년에게 접근해 신뢰를 얻은 다음 성적 학대를 시작하며, 이후로는 회유나 협박을 통해 폭로를 막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루밍은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 범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성인을 심리적으로 길들여서 노예처럼 부리는 범죄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어려서 천애고아가 된 김씨는 배움이 전혀 없어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함께 산 사람은 두 아들을 낳아놓고 집을 나갔다. 그는 가끔 동네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받은 식량으로 두 아들을 먹였으나, 항상 굶주렸다.

좌절감에 술로 몇 해를 보낸 그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형수가 취직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농장인데, 먹여주고 재워주며 월급도 준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을 동생에게 맡기고 농장에 들어갔다.

농장 주인 부부는 한동안은 김씨에게 친절했다. 축사 옆 창고가 그의 숙소였으나, 먹여주고 재워주었으며 적지만 월급도 주었다. 그러나 그가 농장 주인 부부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지면서 부부의 태도가 돌변했다. 주인 부부는 그를 마음껏 부려 먹기 시작했다. 농장을 떠나 살 자신이 없었던 그는 그렇게 길들여졌다.

주인이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일하라면 일하고, 자라면 잤다. 찬밥에 물을 말아서 허연 김치를 반찬 삼아 끼니를 때웠다. 시간이 갈수록 고된 일들이 주어졌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밭을 갈고 풀을 뽑고 여물을 주었다. 일이 좀 서툴다 싶으면 주인 부부의 험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매질도 당연지사였다. 정신은 이미 황폐해졌고 육체의 고통을 잊기 위해 더욱 술에 의지했다. 주인이 며칠에 한 번씩 쥐어주는 만 원, 이만 원으로 술을 샀다. 술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느 날, 김씨는 주인과 함께 면사무소에 갔다. 행색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면사무소 직원이 뭐라고 물었으나, 대답할 수가 없었다. 주인이 대신 대답했고, 그는 종이에 서명만 했다. 그가 한글을 몰라 주인이 그의 손을 잡아 대신 써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기초연금과 복지급여를 신청했단다. 그 후 국가로부터 받은 돈은 모두 주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김씨는 주민의 신고로 경찰에 구조되기까지 20년을 노예로 살았다. 경찰에 구조되었을 때 그는 음식을 씹을 이빨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식도암 말기 상태였다. 주인은 그를 병원에 한 번도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자, 농장 주인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던 그를 찾아왔다. 100만원을 줄 테니 서류에 지장을 찍으란다. 농장 주인이 그의 엄지에 인주를 묻히더니 강제로 서류에 찍고, 100만원을 건넸다. 이 서류는 합의서였고, 이로 인해 농장 주인은 구속을 면했다. 농장 주인은 도의원까지 지낸 지역의 유지였다고 한다.

김씨는 경찰에 구조되고 6개월만에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법의 심판대 위에 선 농장 주인은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김씨의 자식들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한 사람을 20년 동안 노예처럼 부린 사람에 대한 응징으로는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김씨는 저승에서 그나마 자식들에게 남겨준 것이 있어 다행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도움을 줬던 한 성인 그루밍 피해자의 인생 이야기다. 그루밍 피해,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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