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속 레인저 손경완 “몸 망가졌지만 후회없다”

10년간 설악산사무소 레인저로 근무
“절벽에서 추락한 경험이 트라우마 되기도”

손경완 국립공원산악안전교육원 과장이 19일 서울 서대문구 국립공원공단 사무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CJ ENM 제공

“2008년 7월 20일. 호우주의보 발효. 비선대 탐방로 점검, 위해목 제거작업. 수로 정비.”
“2010년 3월 2일. 생존자 김모 씨. 실종자 정모 씨, 이모 씨. 김씨 등 3인 2월 27일 오전 5시 매표소 통과 후 설악골 입산. 3월 1일 비선대 방향으로 하산 중 눈사태로 2명 실종. 공룡능선 구조활동 중 생존자 만남.”

손경완(51) 국립공원산악안전교육원 과장이 작고 낡은 수첩들을 꺼냈다. 색이 바랜 수첩들 속엔 그가 국립공원공단 설악산사무소에서 10년 간 레인저(국립공원을 보호·유지·관리하는 직원)로 활동한 기록이 빼곡이 담겨 있었다. 수첩마다 설악산 지도와 능선도, 사람들이 자주 찾는 등반 코스의 개념도도 붙어있었다.

tvN 드라마 ‘지리산’ 속 레인저의 실제 모델인 손 과장을 19일 서울 서대문구 국립공원공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레인저는 시설물 관리와 순찰, 구조활동, 자연자원 조사 등 다양한 업무를 맡는다. 산이 좋아서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손 과장은 그런 이유로 레인저가 된 건 아니었다.

손 과장은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뒤 사진 관련 일을 하다가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서 다른 풍경을 찍어보고 싶어 암벽등반을 배웠다”며 “사진을 찍으러 갔는데 정작 사진 일은 접고 산에서 일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며 멋쩍게 웃었다.

산에 빠져든 손 과장은 민간구조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레인저가 된 건 아내 덕분이다. 그는 “민간구조대 활동을 할 당시 아내가 ‘그렇게 산이 좋으면 제대로 배우고 해보라’고 했고, 2004년부터 등산학교에 가서 등반 기술 등을 배우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몸으로 하는 것들은 남들보다 빨리 배웠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드라마를 쓴 김은희 작가는 손 과장을 비롯한 여러 레인저들을 취재했다. 손 과장의 수첩들은 곧 작품의 극본이 됐다. 그는 “처음 작가님을 만났을 때만 해도 정말 드라마가 만들어질까 반신반의 했다”며 “드라마를 보니 예전에 구조활동하던 일이 생각나 울컥하기도 하고, 내가 하는 일이 TV 화면에 나오니까 오글거리기도 한다”고 했다.

드라마 '지리산'에서 구조활동을 벌이고 있는 레인저 정구영(오정세). CJ ENM 제공

레인저는 국립공원을 지키며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 존재를 잘 모른다.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들은 레인저들이 경험한 ‘실제 상황’이다.

그는 “드라마를 보면 공감 가는 장면이 많다.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그려질 줄 알았다면 숨겨진 이야기를 더 할 걸 그랬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엄청난 급류에 휩쓸리는 장면 등에 대해 컴퓨터그래픽(CG)이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는데, 실제는 그보다 더 위험하다”면서 “그런 곳들은 통제구역이라 일반적으로 잘 볼 수 없어 시청자들이 실감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짚었다.

구조활동은 항상 어렵고 조심스럽고, 가슴이 아프다. 레인저들은 실종자의 시신을 발견하면 현장 보존을 위해 구조 헬기가 올 때까지 지키고 있어야 한다. 등반하면서 추락하는 경우가 많아 시신의 상태가 많이 훼손된 경우도 있다. 구조 중 시신을 접하거나 부상당한 경험, 고립된 경험이 있는 레인저들이 트라우마로 일을 그만두는 일도 더러 있다.

한 번은 설악산 천화대의 암벽 등반 코스를 점검하다가 로프를 발견했다. 로프 끝을 따라가보니 등반 중 추락사한 시신 한 구가 있었다. 손 과장이 현장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사망자가 지니고 있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휴대전화 배터리가 남아있었던 거였다.

손 과장은 “가족들이 찾는 전화였는데 그걸 받아서 상황을 이야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며 “밤새 그 전화 벨소리를 듣고 있다가 시신을 인계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드라마 '지리산'에서 산불 진압 현장에 나간 지리산국립공원전북사무소 해동분소장 조대진(성동일). CJ ENM 제공

실종자를 구조하다가 레인저들이 함께 고립되기도 한다. 설악산 황철봉의 출입금지구역에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러 갔다가 비가 오고 안개가 심해 하룻밤을 새고 내려온 적도 있다.

출입금지구역에 단속 활동을 나갔다가 크게 다칠 뻔한 일도 있다. 절벽에서 추락한 것이다. 손 과장은 “절벽 가운데에 있던 나무를 양 손으로 움켜잡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며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트라우마가 남아 회복하는 데 1년이 걸렸다”고 털어놨다.

산불 진압 작업에도 여러 번 나섰다. 2005년 낙산사 화재 당시에도 현장에 있었다. 대부분 불에 탔지만 홍연암이 화재를 피한 데는 손 과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낙산사 외곽에서 불길을 진압하던 중 홍연암 처마 등 구조물에 불이 붙기 시작하는 걸 목격했다”면서 “불 붙은 구조물을 신속히 뜯어내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손 과장은 2015년부터 서울 도봉산국립공원 교육원에서 교육 업무를 맡고 있다. 구조활동을 하면서 무릎, 어깨 등을 다쳐 이제 예전처럼 현장을 누비긴 어렵다. 설악산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낸 일은 커다란 자부심으로 남았다.

그는 “힘들었지만 그 시간들은 내게 무엇보다 큰 자산”이라며 “돌아보면 유독 고맙다는 얘길 많이 듣고 살았다. 몸은 망가졌어도 후회는 없다. 인생 잘 살았구나 싶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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