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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떠난 뒤, 아무리 해도 그 막장 맛이 안난다오”

양산시, 찾아가는 한글학교 어르신 수강생들
뒤늦게 배운 한글로 요리와 관련된 추억 담아

양산시 한글학교 수강생인 박미자(67)씨가 전통음식인 '막장'을 담그는 방법을 적고 있다. 양산시 제공

박미자(67)씨는 막장을 담글 때면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생각난다. 막장을 맛있게 잘 담갔던 남편은 병으로 8년간 많이 아팠다. 그는 남편이 병석에서 일어날 거라 굳게 믿어 막장 담그는 비법을 배워둘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박씨는 “남편이 떠난 뒤 막장을 여러 번 만들어봤지만 아무리 해도 그 맛을 낼 수 없었다”며 “그럴 때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이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다음 생에도 다시 부부로 만나자고 했는데 저는 긴 간병에 지쳐서 싫다고 했다”며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라고 전했다.

“할배가 있는 그곳은 편안한가요? 이승의 나는 가방 메고 중학교에 열심히 다니고 있다오.”

전말분(75)씨는 유난히 아귀찜을 좋아했던 남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남편은 대장암 4기로 투병하다가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신세 많이 지고 간다”는 마지막 말로 전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했다. 전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아귀찜을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때면 아귀찜을 좋아했던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전씨는 양산시 ‘찾아가는 한글교실’에서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 있다. 남편이 좋아했던 아귀찜 요리 비법을 양산시가 발간한 요리 책자에 담았다. 그는 “‘다시물’에 아귀를 살짝 익혀야 간이 골고루 잘 밴다”며 비법을 공개했다.

양산시가 발간한 요리책 '요리 한 숟가락, 사연 두 꼬집'. 양산시 제공

양산시는 최근 한글교실 수강생 50명의 요리 레시피와 요리에 담긴 추억을 담은 책 ‘요리 한 숟가락, 사연 두 꼬집’을 발간했다고 4일 밝혔다. 요리책에는 평생 가족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온 어르신들의 따뜻한 사연이 그대로 실려 가슴 찡한 감동을 전해준다.

지금이라도 엄마를 뵐 수 있다면…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어린 시절, 엄마와의 애틋한 추억을 나눠준 어르신도 있다.

이순해(70)씨는 감자밥 레시피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을 풀어놨다. 옛날 아버지와 오빠들의 밥그릇에는 흰쌀이 담겨있었지만 엄마와 이씨가 먹던 양푼에는 밥보다 감자가 더 많았다. 양푼에 담긴 감자밥은 늘 둘이 먹기에 모자랐지만 엄마는 배가 부르다면서 항상 먼저 수저를 놓았다.


이씨는 어린 마음에 ‘나만 학교에 안 보내준다’고, ‘나도 쌀밥을 먹고 싶다’고 칭얼거렸다. 저녁 내내 성질을 부리며 감자밥을 먹기도 했다.

이씨는 엄마도 학교에 안 보내고 싶어서 안 보내는 게 아니었을 텐데, 나만 배고픈 것이 아니었을 텐데, 한참을 지나 부모가 돼 보니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뵐 수만 있다면 맛난 거 많이 사드리고, (그때는) 어려서 몰라서 그랬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엄마 마음 몰라서 죄송하다고. 짜증 나고 화냈던 거 미안했다고. 엄마 보고 싶습니다.”

박기춘(78)씨는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 밥 한 끼를 푸지게 먹어본 적이 없다. 가난한 시절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은 대충 끓여서 곯은 배를 채우는 게 다였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 들어 살림하게 되니 재료들을 푸짐하게 넣어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여 먹게 됐다.

박씨는 “부모님도 내게 이렇게 맛난 된장찌개를 끓여주고 싶으셨을 것 같다”며 “된장찌개는 힘든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이제는 그때보다는 넉넉한 삶을 사는 나에 대한 만족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이잠순(72)씨는 산골에서 7남매로 태어나 학교도 한번 못 가보고 20대에 시집을 갔다. 엄마는 시장에서 갈치를 사 와서 몸통은 아버지와 아들만 주고 딸에게는 머리와 꽁지만 줬다. 이씨는 울면서 갈치조림을 먹었고 갈치조림을 먹을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

이씨는 “시집살이하다 남편이 저 세상 가고 3남매 키워서 출가시키고 못 배운 것이 한이 돼 글을 배우려고 양산 노인복지관을 찾아왔다”며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줄줄 쓸 수 있을 때까지 받침이 틀려도 열심히 할 것”이라고 적었다.

입덧 고생하던 며느리가 좋아한 마늘장아찌

자녀나 손자 손녀,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게 행복하다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심순덕(60)씨는 입덧으로 고생하던 며느리에게 마늘장아찌를 담가줬던 사연을 요리비법과 함께 풀어놨다. “입덧이 심해 먹지 못하던 며느리가 맛있다며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 후 며느리가 야물고 튼튼한 손주를 안겨줬다. 손주는 우리 집안의 웃음을 안겨주는 보배가 됐다.”

엄옥선(80)씨는 명절이 되면 손자 손녀를 위해 갈비찜을 만드느라 즐겁다고 했다. 엄씨는 갈비찜을 하려면 핏물을 빼고 각종 불순물과 잡내를 제거하기 위해 삶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고 허리를 수십 번씩 더 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먹는 생각에 입에서는 노랫가락이 절로 나옵니다. 즐겁게 갈비를 뜯는 식구들을 보면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손자, 손녀들의 ‘엄지 척’이 나를 또 움직이게 합니다.”

아내를 위해 간식으로 감자를 준비한다는 남편의 사연도 요리책에 실렸다. 박종기(64)씨는 산업재해를 입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다. 박씨는 아내가 직장에 나가서 생활비를 벌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직장 동료들과 간식을 먹는 아내를 위해 매일 감자를 삶아준다. 아내는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남편이 삶아 준 감자라고 자랑했다. 박씨는 “맛있게 먹었다 하니 듣는 나도 기분이 좋고 또 뭐 해줄 거 없나 싶어서 요리연구를 자꾸 하게 된다. 회사 생활할 때는 생각지도 못한 건데 살림도 하면 할수록 실력이 점점 느는 것 같다”고 했다.

양산시는 2010년부터 찾아가는 한글교실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초등 단계, 중등 단계로 나눠 수업이 진행된다. 현재까지 2500여명이 참여했다. 요리 책자에 실린 어르신들의 사연은 다음주쯤 양산시 홈페이지에서 만날 수 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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