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김광보 국립극단 예술감독,“연극으로 존재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국립극단 김광보 예술감독은 휴일에 출근해 있었고 입가에 대상포진 상처가 보였다. 서울시 극단을 거쳐 국립극단을 맡으면서 ‘아침형 인간’으로 바뀌어 있는 듯했다. 예술감독 사무실은 5평 정도의 크기였는데, 벽면은 공연스케줄과 포스터로 채워져 있었다. 책상은 극장 건물 빨간 전경(全景)이 한 눈으로 보이는 곳에 있었다. 정치인들은 SNS로 한국 사회 논쟁(論爭)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그의 페이스북은 일상생활과 감성적인 글들로 채워졌다.
“연극연출자 김광보는 무대에서 지워지는 것 같다”고 인사말을 건네자 그는 ‘창작 공감’ 작품들 평가가 좋다며 안경을 올리며 웃어 보였다. 부산에서 연극을 하다 1987년도에 대학로로 올라왔다. 90년대부터 전투적인 연출을 해오고 있는 김광보 연출가 작품을 본 것은 데뷔작 <지상으로부터 20미터>(작, 장우재, 극단 종각,1994)부터였고 이듬해 배우 염동헌이 다이사트를 맡았던 극단 청우의 <에쿠우스-이미지네이션>(1995) 이었다. 당시 이 작품은 부산 가마골 소극장 공연보다도 강렬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김광보는 악으로 깡으로 연극을 하는 것처럼 보였고, 강렬한 무대의 날 것들과 배우의 에너지는 공간을 움직였고 조명은 극과 장면의 신선한 언어가 되었다.

당시 소극장에서 회전무대를 썼는데, 공간을 감각적으로 확장하려는 연출의 도전적인 발상으로 느껴졌다. 30년 전 무대의 전경을 돌아보면, 이 두 작품은 김광보의 연출 감각을 테스트하는 작품들이었다. 30년 전 극장과 조명 분위기를 소환하자 그는 웃었다. 조광화와 콤비를 이루며 창단공연 <종로고양이>을 기점으로 <오필리어>, <꽃뱀이 나더러 다리를 감아보자 하여> 세 작품 연달아 발표(1995)하며 조광화, 김광보 시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나이 32살 때였고, 대학로 입성 7년 만에 한국연극 세대교체 신호를 주는 연출자가 되고 있었다. 10여 명이 회의할 할 수 있는 책상테이블로 두 사람은 앉았다. 햇빛을 등져 있었고 피곤해 보였다. 고향의 억양은 여전했고 말투는 무대연출가로 돌아와 있었다. 대상포진이 보이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하다 5분도 안 돼 시선은 2인극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국립극단을 말 할 때는 지쳐 보이면서도 자신감은 넘쳐 보였다.


| 90년대 시절에는 날 것들로 버티며 연극을 했다.

― 김광보 연출하면 95년도 <종로고양이> 조광화와의 시리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종로 고양이>를 추천받았어요. 공연은 조광화도 만족했던 작품이었죠. 광화 씨가 공연이 끝날 때 ‘이 작품은 내 품을 떠는 것 같다. 광보 형 작품이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둘 다 연극으로 뜨거웠던 시절이었어요. 연극에 대한 욕심도 많았고. 날것의 느낌들로 무대를 채우던 시절이었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종로 고양이 입니다 배우들과 작품 에너지가 장난이 아니었고요. 당시 대학로는 창작극보다 로맨틱 코미디, 번역극을 올릴 때였어요. 젊은 시절 연극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연극처럼. 원시적으로 회복(回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출을 하던 시절이었죠. 그렇게 김광보의 연극이 민들어지게 된 겁니다.<오필리어>는 난리를 친 작품인데 평론가 안치운 선생한테 박살이 났어요. 그 당시에는 소위 말하는 뒷골목 연극이라는 게 있었어요. 제도권 연극에서 벗어난 젊은 연극인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작품들을 주로 그 골목 소극장에서 올리던 시절이었어요. 극단 청우가 원시적인 연극의 원형을 회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작품이었고요. 조광화와의 인연과 작품은 제 연극 인생에 전환점이 되어준 작품이죠. 그 뒤로 광화 씨도 연출하게 되면서 같이 안 하게 되었지요.”

김광보의 무대는 작가의 텍스트를 입체적인 무대언어로 그려내는 것에 감각적으로 탁월한 연출가다. 때로 그의 무대에서 조명은 장면을 응축해내는 언어가 되기도 하는데, 부산 가마골을 거쳐 88년도에 후반 부산문화회관에 들어가 2년 1개월 조명전문가를 하며 연극을 만들던 감각은 여전히 그의 작품의 미장센으로 투사(透射)된다.

―당시에는 직장을 버리고 90년도에 서울 대학로로 왔다.

“88년 올림픽을 하던 봄에 부산문화회관에 들어간 것 같아요. 2년 쯤 있다가 부산을 떠나고 싶었어요. 집과 연극 환경 등 모든 것이 겹치던 시절이었죠. 사표를 내고 받은 퇴직금이 90만 원 정도였는데 그 돈 들고 무작정 대학로로 와서 바탕 골 소극장에 있다가 <지상으로부터 20미터> 연출 데뷔를 하면서부터 종로 고양이로 극단 청우를 창단하고 본격적으로 연출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90년대 초반 최용훈을 선두로 김광보, 조광화가 등장하면서 대학로는 이 세 명의 연출가의 시대로 한국연극의 세대교체를 이루게 된다. 김광보는 <지상으로부터 20미터> 공연부터 서울시극단의 <물고기인간>(2019)까지 초연과 재공연을 포함해 107개 작품을 연출했고 공연을 해왔다. 국립극단 예술감독(2020) 으로 선임된 뒤 “국립극단에 가면 작품연출을 하지 않겠다. 단 한 번의 기회도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주겠다”고 말했고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예술감독 1년 6개월의 반환점을 돌면서 숨통이 트이자 올해 10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세인트 조운>(작, 조지 버나드 쑈)을 국립극단 작품으로 연출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서울시 극단 예술감독에서 국립으로 넘어오면서부터 연출가 김광보는 없어진 것 같더군요. 국립극단의 연극 제작 환경을 감안하면 연출 욕심이 날 텐데요.

“국립극단으로 오면서 선언했잖아요. ‘국립극단에 가면 직접 작품을 하지 않겠다. 한 번의 기회도 후배들한테 그 무대를 제공 하겠다’고 말을 했지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요. 올해 작품 라인업을 할 때 작품 추천 자문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위원회에서 예술감독은 작품 연출을 하지 않냐고 김광보도 작품을 해야 한다고들 강력하게 말씀들 하셔서 올해 하반기에 국립극단에서 연출하게 됐습니다.”

― <물고기 인간> 이후로 3년 만에 연출하는군요.

“제가 좀 유통성이 없지요. 원칙주의자이기도 하고 명분주의자라는 것을 국립극단 오면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국립극단 일이 많습니다. 제가 문체부 고위공직자분들하고 국립극단 특성상 일들을 하게 되는데 잘하더군요(웃음). 국립극단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명분으로 생각하니까 행정도 잘하게 돼요. 그런데 김광보는 연극 연출자이고 행정가로 체질(體質)을 바꿀 수 없는 것을 느꼈습니다. 배우들하고 대본 리딩을 한 적이 있어요. 죽어 있던 연출 감각세포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데 온몸에 전율이 일더군요. 김광보가 연극 연출자라는 것을 다시 느낀 거죠. 극단에 돌아가서도 연출을 시작한다면 연극을 더욱 사랑하면서 하게 될 것 같아요.”

|1년 6개월의 반환점을 돌다. ‘국립극단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시급하다’

연극연출자의 전투적인 감각은 연극 행정에도 안정성을 보여 오고 있다. 서울시 극단장 겸 예술감독 (2015)으로 선임되면서는 “정기 공연을 직접 연출해 서울시 극단 분위기를 살려내겠다”고 말했었다. 한 해 6억 정도의 예산으로는 외부 연출가들에게 전체 작품을 맡길 수 없었다. <여우인간>(2015), <나는 형제다>(2015), <헨리4세-왕자와 폴스타프>(2016), <왕위주장자들>(2017), <옥상 밭 고추는 왜>(2017), <사막 속의 흰개미>(2018), <물고기인간>(2019) 정기공연 작품을 직접 연출하면서 작품성과 시극단의 분위기를 한 단계 올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극 <와이프>(2019, 신유청연출>은 그해 제56회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출상, 신인연기상, 제56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남자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하며 작품개발에도 감각을 보여주었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뒤 추진하고 있는 <창작공감: 작가·연출> 플렛폼을 통해 발굴된 작품들은 <밤의 사막 너머>(신해연 작, 동의향 연출>, <금조이야기>(김도영 작, 신재훈 연출>,<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 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배해률 작, 이래은 연출>이 올해 시리즈로 공연되면서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 연극 연출자 김광보는 예술행정 감각도 있는 것 같군요.

“해야 된다는 스스로의 명분이 분명하게 주어지니까 ‘이걸 해내는구나’라고 생각했었어요. 서울시 극단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하루 수십 번 회의하고 계획을 세우는 일들이 많고요. 예술감독으로 결정하고 할 일들이 많습니다.(그가 스마트폰으로 스케줄을 보여준다) 쉴 시간이 없습니다. 명분과 원칙은 김광보를 설명할 수 있는 근간일 수 있는데, 지금 와서 바꿀 수도 없는 일이지요.”

― 국립극단 구조상 문화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 사회와 소통은.

“소통이 잘 됩니다. 공무원들하고 친하게 지낼 줄 몰랐어요. 예술국장, 정책실장, 차관까지 국립극단 방향에 관해 얘기하는데 거리낌이 없이 소통하고 있죠. '쿨' 하게 얘기하고 '쿨' 하게 끝납니다.(웃음) 윤성천 예술정책관은 국립극단을 많이 도와주시는데, 그분 자체가 쿨 하신 분이고 고마운 분입니다. 공무원이 이렇게까지 쿨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그분과 일하면서 느꼈어요.”

― 정부와 해결해야 할 현안(懸案)도 많을 텐데.

“국립극단 조직구조와 예산 관련해서 많은 얘기를 하게 됩니다. 조직이 안정되어야 국립극단이 확고한 방향을 잡을 수가 있다고 봐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고요. 지속해서 예산을 안정적으로 지원을 받는 것, 이 두 가지를 해결해야 합니다. 극장 이전 문제는 예민하고 중요한 문제인데, 외부에서 공청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정부와 문체부 관계자들과 소통하면서 방향을 잡고 해결해 보려는 것이 해야 할 일이죠. 매일 하루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외부에서는 국립극단 행정인력들로 조직이 안정화 되어 있고, 예산도 국립극단과 명동예술극장을 운영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느끼고 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대상이 많다는 것은 국립극단의 조직이 안정이 안 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김광보는 시선을 바꾸었고 몸의 방향을 바꿨다. 정규직 문제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직원의 3분1 정도를 정규직화 시켜야 안정적으로 일을 하고 조직의 방향을 이끌고 잡아나갈 수 있어요. 비정규직은 불투명하고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잖아요. 국립극단하고 명동예술극장이 별도 조직으로 운영되다가 합치게 되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는데 정규직 인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조직이 안정되려면 구성원들 업무의 안정화가 최우선으로 되어야 하고요. 노사협의를 통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국립극단의 일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전임 예술감독과 단장들도 해결해 보려고 했잖아요?

“자진해서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2020년부터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올때쯤 쌓여있었던 정규직 전환 문제들이 물꼬가 터졌고 제가 받게 된 겁니다. 해결되도록 노력해야죠. 현재는 뚜렷하게 답변을 들을 수는 없는데 가능성도 반반 인 것 같아요. 그동안 국립극단의 전문인력 문제는 많이 변화되고 바뀌어 온 것도 사실인데, 현재 국립극단 운영 규모로 보면 정규직을 더 확대해야 안정적으로 국립극단의 방향을 잡아 나갈 수 있습니다.”

국립극단 직원들의 정규직화를 말할 때 그의 표정은 투사(鬪士)처럼 보였다. 문재인 정부 초기 대통령의 1호 국정과제가 공공부문 정규직의 전환이었다. 당시 2020년까지 20만 5,000명의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으로 기대했다. 비정규직이 80%가 넘고 있었던 인천공항 공사를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했고 문재인 정부 5년간 370개 공공기관에서 10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노동계에서는 윤석열 정부를 향해 정규직 전환의 시간끌기용 희망 고문은 더 이상 하지 말아 달라며 호소하고 있고, 출범한 정부는 부실 공공기관과 꼼수 정규직 전환 수술을 예고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경제회복과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다. 질문을 할 때쯤 그가 점심으로 주문한 우동이 배달 됐다. 창문을 열고 식사하면서 인터뷰가 이어졌다.

― 민간극단이나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비교적 넉넉한 예산으로 국립극단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예산은 있어도 부족하고 없어도 부족합니다. 현재 국립극단 여건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지만 인건비는 현실화시켜야 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면 국립극단이 1년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는 데는 넉넉한 형편은 안 돼요. 보통 두 달 연습에 한 달 공연을 하잖아요? 배우 개런티도 현실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국립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을 더욱 보장해야 하고 환경개선도 필요해요. 현실화는 되어 있는데 좀 더 넉넉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 예술감독(단장)으로 국립을 운영한지 2년 가까이 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평가는 어떻죠?

“딱 1년 반 됐어요. 1년 정도는 적응하는데 다 보냈어요. 서울시 극단 예술감독 행정업무 하고는 비교 안 될 정도로 무게감이 큽니다. 조직의 구조도 그렇고요. 조직특성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예술 감독과 행정감독을 분리해야 합니다. 분리는 하되 행정감독 직급이 낮아야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어요. 직급이 동등하면 싸우게 됩니다. 서울시 예술감독 역할이 80%, 행정이 20%라고 한다면 국립극단은 반대입니다. 예술감독이 공연팀들 연습현장에 마음 놓고 들어가 보질 못해요. 현안들이 끊임없이 생겨요. 사무실에 들어오면 노크 소리가 납니다. 쉴 틈이 없지요. 장기적으로는 예술감독과 행정감독 역활이 분리되어야 조직, 작품, 행정도 국립극단의 방향성을 견고하게 할 수 있어요. 한국연극의 미래를 다지는 길이기도 하고요. ”

― 김광보는 국립극단의 예술성과 국립으로써 작품의 방향성은 예술감독이 끌고 나가고 행정과 예산, 조직 운영은 행정감독 체제로 분리되었을 때 국립극단이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안정화되고 정착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어떠한 변화를 주고 싶었나?’

“말씀을 드렸지만, 세대교체를 하겠다고 했잖아요. 지금도 국립극단이 그렇게 가고 있어요. 작년과 올해 라인업을 봐도 실천하고 있습니다. 창작 공감 플랫폼도 그렇고요. 창작 공감을 만든 이유가 실패할 기회를 국립극단에서 준다는 겁니다. 경험을 국립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성과가 좋으면 좋은 대로, 실패하면 실패하는구나 하고 신진연극인들이 국립극단을 통해 경험한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서울시에서는 창작플랫폼이 반응이 좋았고 국립에서는 ‘창작공감’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기회 차원에서는 명동예술극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자혜, 신유청도 명동극장 연출은 처음입니다. 전윤환(기후비상사태: 리허설), 이연주(엘리스 인 베드) 연출도 그렇고요.”

| 국립극단은 세대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실패할 수 있는 경험을 국립을 통해 주고 싶었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뒤 추진하고 있는 작품개발 사업 <창작공감: 작가> 플랫폼을 통해 발굴된 작품들이 <밤의 사막 너머>(신해연 작, 동의향 연출>, <금조이야기>(김도영 작, 신재훈 연출>,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 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배해률 작, 이래은 연출>이 올해 시리즈로 공연되면서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창작공감 연출>은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연출 김미란), <커뮤니티 대소동>(연출 이진엽), <소극장 판-타지>(연출 강보름) 작품들이 공연되었다. 올해 8월부터는 <엘리스 인 베드>(8,24~9,18,명동예술극장, 작 수잔손탁 연출 이연주) 작품을 출발로 <스트레인지 뷰티>(소극장 판, 배요섭 연출), <채식주의자>(백성희장민호극장, 원작 한강, 각색연출 셀마 알루이), <세인트 조운>(10.5~10.30 명동예술극장, 연출 김광보),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작,연출 정진세)와 <발가락 육상천제>(소극장 판, 작 김연주, 연출 서충식)과 임도완 연출의 <스카펭>(11,23~12,25. 명동예술극장)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 연극 연출, 작가, 배우와 스태프들이라면 창작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 국립극단을 통해 도전적으로 작업을 하고 싶을 거다. 창작자들의 실패도 중요하지만, 국립극단이 개방하는 작가와 연출에 대해 공정한 기회도 중요하다.

“공정한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고 있고 작품개발팀이 있습니다. 연출가, 작가의 예술인력 풀이 있는 거죠. 작품과 연출자 선정을 위해 회의를 지속해요. 작품개발팀, 공연기획팀들 추천제안을 받기도 하고요. 내년 국립극단 라인업도 2주에 한 번꼴로 회의하고 있어요. 이 연출은 국립하고 작업해 본 적이 없는데 작품이 기대된다며 추천도 하고, 수상 경력이 많은 연출자인데 국립하고 무대 경험이 없는 분들 추천받기도 하죠. 그 과정에서 공정한 심의를 거치기도 합니다.”

“예술감독 권한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준이 ‘창작자의 시선’이 중요해요. 그런 관점에서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 어떠한 연극 형식에 담고 싶다든지 그런 관점에서 공연을 보러 다니고 있고 선택을 하고 있지요. 예술가의 시대적인 발언, 연극을 통한 자기 발언권이 무대를 통해 확고한지를 보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 연출가를 캐스팅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구자혜, 신유청은 개성이 강한 연출들입니다. 이준우 연출도 잘하는 것 같고요. 전윤환, 이연주 연출한테도 기대하고 있어요. 작품이 정말 궁금합니다.”

― 작품과 연출자의 선정은 ‘김광보 예술감독의 시선’이 중요하군요.

“그게 바로 예술감독의 역할인 것이죠. 어떤 형태의 연극으로 무대에 담을 것인지는 연출가의 역할이고 어떤 형태의 연극을 보여 줄지 그 친구들한테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선택하는 기준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라는 관점(觀點)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형식의 연극에 담아낼까 하는 기준에서 기대가 되고요. 국립이 기존연극을 나열하는 방식을 탈피해야죠. 창작 공감은 작품을 개발하고 연출가들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기존하고는 분위기가 확실하게 달라진 것 같아요. 세대교체라는 것은 단순히 실험극을 하고 젊은 연출가들의 도전적인 무대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신유청 연출은 정석으로 연극을 하는 연출가에요. 세대교체는 젊은 작가와 연출가에 한정되지 않고 연극으로 한국연극의 변화를 줄 수 있는 작품과 연출의 의미로 세대교체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합니다.”

| 연극으로 김광보의 존재를 지켜내고 싶었다. 어쩌면 30년 동안 그것을 증명해 보이면서 살아온 것 같다.

― 그는 현재 한국연극의 토양에서 세대교체의 변화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듯해 보였다. 김광보 연출도 90년대 후반 한국연극에 있어 세대교체의 변화를 주도하는 연출가였다.

“저하고 박근형 연출가가 40대 말에 동아일보 차세대 연극인 1위였어요. 40세에 됐는데 말이 안 되잖아요. 그만큼 한국연극 토양이 촘촘하게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요. 할 수만 있다면 비어 있는 것을 좀 채우고 싶어요. 다양한 층들이 마음껏 연극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제 연극 환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연습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하는 게 있어요. 성인지 감수성 교육과 위계 폭력 방지에 프로그램들을 전문 강사들이 교육합니다. 배우들의 신뢰감도 옛날식이 아니에요. 상명하복으로 선배가 후배한테 소리 지르는 세상은 지나간 거죠. 배우로서 동등한 입장을 서로 지켜주어야 해요. 가끔 보면, 옛날 습성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연습 분위기를 망칩니다. 핵심은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호 작업자로 존중이지요. 그것을 국립극단이 과감하게 개선하고 있는 거죠.”


― 톤은 강했고 질문을 던지면 확고한 생각만 표현했다. 그의 말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민감할 수 있는 문제로 판단되거나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그때마다 녹음마이크는 몇 차례 정지되었다. 그만큼 그는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맡은 뒤 35년 전 부산에서 올라와 연극을 하던 연출처럼 여전히 뜨거웠다. 그가 부산시립극단 예술감독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부산시립예술감독을 할 때(2009)는 불안했어요. 다시, 부산으로 간다는 것이 김광보가 연출자로 지워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립예술감독을 한다니까 금의환향했다고 생각했는데 불안한 느낌이 많았어요. 돌이켜 보면,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연출을 하고 작품을 한다는 것이 김광보 무대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고 생각했죠. 솔직히 무대에서 자신을 들어내 보이고 싶었고요. ‘사람들로부터 지워지기 싫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별하게 할 줄 아는 게 연극밖에 없었어요. 연극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뜨겁게 지나온 시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야만의 시대’를 관통해 온 것 같아요.”

― 연극계도 위계나 일그러진 폭력의 시대를 겪으면서 연극을 만들어 왔다. 미투 사태를 겪으면서 이제는 연극계 분위기도 성숙해지고 있다.

“연극을 치열하게 한다고 하잖아요. 치열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한 거예요. 결국은 자신의 연극적인 욕망의 도구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야만적인 시절을 겪어 온 겁니다. 사실은 그 시대가 굉장히 부끄럽습니다.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생각하면 ‘그 시대에 연극은 그렇게 하는거야’라는 분위기도 있었고 그런 시절이었으니까요. 연극의 강렬한 욕망을 연출가의 카리스마로 생각했었던 합리적이지 못한 시대였어요. 30년 이상 연극을 하다 보니 시대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해 온 것 같아요. 그 시대를 돌아보면 부끄럽다. 무식하게 연극만 하면서 달렸던 것 같아요.(웃음) 이제는 성인지 감수성도 받아야 하고, 위계 폭력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시대에서 연극을 하잖아요. 동등한 입장을 존중해서 연극을 해야만 하는 그런 시대에서 연극을 하는 겁니다.”

“제가 국립에 오면서 바뀐 게 있어요. 어떤 연출자는 국립에서 연극을 한다고 하면 뭐든지 다 된다고 생각해요. 무대에서 비나 불과 같은 강렬한 효과를 주려고 극장에서 설치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할 때가 있어요. ‘최선을 다해서 무대를 만들겠다’고 하면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합니다.’ 연출의 구체적인 플랜도 없이 배우를 무대에 세워놓고 조명 큐 잡는다고 뺑뺑이 돌리고... 그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연출로써 욕망을 채우려는 거죠. 자신의 욕망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시대는 아니고요. 국립극단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 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해요.”

극단 청우를 창단하고 1997년도에 심리적으로 파산을 하고 손진책 연출이 이끄는 극단 미추산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만든 작품이 박상륭 소설< 뙤약볕>이었고 이 작품으로 1998년도 한국연극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5, 신진 연출상을 받았고 이듬해 한국일보사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 상을 받으면서 김광보를 견고하게 알리는 작품이 된다. 연출가로 2000년도에 고연옥 작가를 만나면서 <인류최초의 키스> 작품으로 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을 수상하면서 이후에도 김광보, 고연옥은 많은 작품을 같이 해왔다.

| 극단 청우로 돌아가 연출을 한다면 연극을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 고연옥 작가와는 < 인류최초의 키스>가 첫 작품이죠.

“2000년도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때 고연옥 작가가 보여준 작품이 <인류최초의 키스>였는데 제가 그때는 자신만만했어요.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말리극장 예술감독인 레프도진은 연극의 기본과 원칙은 놀이다, 플레이(Play)라고 했잖아요. 작품은 감옥얘기 였는데 페이소스가 코미디로 느껴졌어요. 역설적으로 작품을 풀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고연옥 작가와 처음으로 하게 된 작품 이였습니다. 고연옥 작가 작품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분명한 시선’이 있어요. 국립에서 공연한 <주인이 오셨다>(2011) 작품이 있는데 고연옥씨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라고 표현했죠. 서울시 극단 <나는 형제다>가 마지막으로 했던 작품입니다.”

―이제 연극 연출한 지도 반세기 고지를 달려가고 있다. 서울시 극단과 국립극단을 거치면서 안정적인 환경을 벗어나기 힘들 수 있을 것 같다.

“국립극단 역할이 마무리되면 극단 연출자로 돌아가고 싶어요. 후배들이 국립 끝나면 뭐 할 거냐고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연극을 해야지’라고 말해요. 유승주, 김상호 배우가 극단 청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 극장을 하자고 말할 때 고맙게 생각했어요. 힘들 때 극단 청우 초창기 멤버들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눕니다. 결론은 청우의 정신이 있는 그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서 서로 보태서 극장을 만들자는데 합의했어요(웃음). 저한테는 30년을 연극무대에서 버틴 내공이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연출,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후학들도 가르치고 싶고요. 극장을 극단 청우 단원들과 연극을 함께하고 제자를 양성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욕심 없어요. 이제 극단으로 돌아가 연출을 다시 하면 연극을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그는 일본에서 대중음악 작곡을 전공한 딸 이야기를 묻자 스마트폰을 열고 노래를 들려줬다. 멜로디는 감미로웠고 노랫소리는 중독성이 있었다. “일본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일본 에이전시 회사와 2년을 계약했어요. 딸이 작곡한 노래들이 오리콤 차트에 올라가야 하는데 딸도 피 나는 노력을 하는 것 같아요. 음악이 일본에서 K-POP 열풍으로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들어도 워낙 작곡한 멜로디도 좋고, 노래를 잘 부르고. 싱어송라이터를 하고 싶어 해요. 딸아이 음악이 좋죠? 우리 딸 인간 승리 한 거에요.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수많은 배우와 연극을 수백편 연출한 김광보도 딸의 노랫소리에는 듣고만 있었다. 혼자 외롭게 사무실에 있을 때 딸이 작곡한 멜로디와 노래를 수십 번 반복해서 듣는 것 같았다. 그와 인터뷰를 한 지 3시간이 넘어서고 있었다. 공휴일에도 오후에 회의가 잡혀 있었다. 서울역에서 내려다본 국립극단 빨간 지붕들은 무대 세트처럼 보였고 김광보만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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