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고대 로마의 역사를 소재로 한 시오노 나나미의 장편 역사에세이 ‘로마인 이야기’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클레오파트라가 활약한 카이사르로부터 옥타비아누스로 이어지는 시기일 것이다.

공화정 로마는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 3두가 정치를 이끌고 있었다. 이른바 ‘3두 정치’다. 그런데, 3두 중, 카이사르가 세력이 제일 약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전과를 통하여 세력을 키우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크라수스가 죽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원로원 대신들은 온전한 폼페이우스를 편들고 있었다. 그래서 급기야 카이사르를 제거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로 회군한 것이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온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유명한 연설을 한다.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우리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

카이사르의 기세에 놀란 폼페이우스가 결국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 버리자, 폼페이우스를 잡으러 이집트까지 쫓아간 카이사르는 여기서 클레오파트라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21세, 카이사르는 52세였다. 카이사르는 양탄자에 나신을 둘둘 말고 은밀히 나타난 클레오파트라에 넘어간다.

카이사르의 운명은 여기까지였다. 카이사르가 권력을 잡고 독재에까지 이르게 되자 그가 왕이 될지 모른다고 두려워한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한 것이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후계자 1순위가 옥타비아누스, 2순위가 부르투스였다는데, 부르투스도 암살에 가담했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부르투스 너마저도...’라는 말을 남기며 죽어갔다.

카이사르를 죽인 부르투스는 이렇게 변론했다.
‘내가 카이사르를 죽인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해서입니다’

한편, 카이사르의 아들까지 낳은 클레오파트라의 운명이 기구하다. 카이사르가 죽으면서 유언장엔 클레오파트라와 아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카이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는 단지 정부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배신감을 느낀 클레오파트라는 이번에는 실권을 잡은 안토니우스를 유혹한다. ‘피라미드에 달이 걸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당신이 보고싶어요’라는 편지에 안토니우스도 결국 넘어간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해전에서 지고 클레오파트라 곁에서 숨을 거둔다. 이에 클레오파트라도 자살한다.

불행한 죽음을 맞은 클레오파트라를 ‘팜므파탈’이라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한 건 그녀의 나라 이집트를 구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도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가 지명한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가 되었고 전 재산을 로마에 기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훌륭한 정치가였다. 그래서 그는 죽어서 시저, 카이저 등 황제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최종 승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모든 권한을 이양한다. 이에 화답하여 로마시민들은 그에게 황제란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붙여주었고, 그의 자손이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역사가 가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로마의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불사르며 로마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가 초심을 잃고 독재를 하려다 암살을 당한 반면, 권력자가 되어서도 초심을 잃지 않고 권력을 나눈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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