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활 건 글로벌 전쟁’… 격동하는 반도체, 위기의 한국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지난 7일 미국 애리조나의 신규 공장 장비반입식 자리에서 “세계화는 거의 끝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TSMC는 애리조나 공장에서 2024년 4나노, 2026년 3나노 공정의 반도체를 만들기로 했다. 그동안 대만에서만 초미세공정을 적용하던 TSMC가 미국의 압박에 백기를 든 것이다.

이번 결정은 수십년을 이어온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분업화’가 막을 내렸음을 알린다. 미국은 1990년 세계 반도체 생산의 37%를 차지했지만, 2020년에 12%까지 내려앉았다. 부가가치가 높은 시스템 반도체 중심으로 설계에 집중하고, 생산은 대만 한국 등 아시아 국가로 아웃소싱한 결과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반도체 공급난을 겪은 데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면서 도전하자 미국은 전략을 바꿨다. 반도체를 ‘안보자산’으로 설정하고 패권경쟁의 최전선에 세웠다. 미국 정부와 기업은 ‘메이드 인 USA’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따라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일본 한국 대만의 합종연횡, 눈치보기, 경쟁은 어느 때보다 치열해졌다.

애리조나에서 열린 TSMC 장비반입식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애플, AMD 등 주요 기업이 참석했다. 애플은 애리조나 공장에서 만든 TSMC 반도체를 사용하기로 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이보다 낙관적일 수 없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반도체 공급망 구축은 삼성전자, SK실트론 등에서 잇달아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면서 탄력을 받고 있다.


미국이 정부차원에서 개입해 반도체 시장의 큰 물줄기를 바꾼 건 30여년 만이다. 미국은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을 통해 일본 반도체 산업의 발을 묶었다. 당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낮은 가격을 앞세워 미국의 아성을 공격했다. ‘제2의 진주만 공습’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미국 상무부는 일본산 메모리 반도체를 대상으로 반덤핑 조사에 나섰다. 결국 일본은 저가 수출을 중단하기로 했다. 일본 내에서 미국산 반도체 점유율을 20%(기존 10%)까지 높이는 등의 협정에 합의한다. 1996년 2차 미·일 반도체협정이 완료됐고, 한때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80%를 차지했던 일본 기업들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다.

14일 반도체 산업계에 따르면 미국이 중국을 배제하고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선언하자 EU 일본 등은 빠르게 대응에 나섰다. EU 집행위원회는 430억 유로(약 59조원)을 투자해 2030년까지 유럽 내 반도체 생산 비중을 전체의 2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유럽에는 반도체 설계기업 ARM(영국), 노광장비 업체 ASML(네덜란드) 등이 있다. 칩 설계와 장비 관련 특허가 강점이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에 초점을 맞춰온 일본은 최근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입지를 다지는 중이다. 일본은 20년간 반도체 산업을 지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생산, 기술 개발 등에 전폭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5000억~1조엔 규모의 반도체 산업 지원기금도 조성할 방침이다.

기세가 꺾인 중국은 반등을 엿보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중국이 반도체 산업에 1조 위안 이상의 지원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 제재를 이겨내기 위해 정부 차원의 ‘대대적 지원사격’을 예고한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5년간 중국 정부가 내놓은 지원계획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고 덧붙였다.

중국은 초미세공정을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대신 미국의 제재가 상대적으로 덜한 28나노미터 이상에서 생산능력을 끌어올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운다는 전략이다. 자동차, 가전 등 많은 분야에서 28나노 이상 공정의 반도체가 쓰이기 때문에 중국의 시도는 미국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제재의 직격탄을 맞은 화웨이는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한 뒤 반도체 투자를 늘리고 있다. 2021년말 패키징, 테스트를 담당하는 반도체 후공정 전문회사 화웨이정밀제조유한공사를 설립했다. 또 다른 자회사 하보과기투자는 반도체 장비·소재·EDA 소프트웨어 업체 등 52곳에 돈을 투입하고 있다. 이베스트투자증권 남대종 애널리스트는 “미국의 견제에도 중국 정부는 반도체 내재화에 더 속도를 높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중국 상무부는 미국의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중국은 “미국이 최근 몇 년간 국가안보 개념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수출 통제조치를 남용하고, 반도체 등 상품의 정상적 국제무역을 방해하며, 글로벌 산업망과 공급망 안정성을 위협했다”고 주장한다.

반도체 시장을 놓고 주요국의 각축·신경전이 거세지면서 한국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경쟁국은 민·관이 힘을 합쳐 속도전에 나서는데, 한국은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높다.

반도체 클러스터 인허가 절차 간소화, 세액공제율 확대 등을 담은 ‘K칩스법’은 지난 8월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넉 달째 잠자고 있다. 2019년부터 본격 추진된 용인반도체클러스터는 4년이 지났지만 언제 가동될 지 기약이 없다. 지금 속도라면 당초 목표였던 2024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2027년도 용인반도체클러스터 가동이 어렵다는 전망마저 나온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국제적 산업 분업화와 시장경제 효율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반도체를 안보 문제로 규정하고, 이에 맞춰 정부가 적극적으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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