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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시골 대장간


외딴 섬마을. 바다 끝에서부터 수상한 바람이 몰려오면 함석지붕이 날아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문이며 장독대 옆의 닭장까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져 버린다.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새밭 울타리마저 흔적 없이 사라질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오다 잠시 숨 몰아쉴 즈음이면 느닷없이 폭우와 합세를 하고선 군데군데 논밭을 홀딱 뒤집어 놓곤 한다. 종횡무진 날뛰던 태풍은 숱한 수재민들에게 절망과 고통을 남겨 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떠난다.

우리 집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빨간 벽돌집이었다. 튼튼하다고 소문난 집이었지만 태풍은 함석지붕 몇 장을 호일처럼 구겨서 멀리 날려 버렸다. 바로 옆집은 섬 지방에서는 가장 큰 병원이었다. 보통 때는 별일이 없었지만, 태풍이 지나간 다음이면 밤낮없이 환자들의 신음을 들어야 했다.

태풍이 가옥과 재산만 휘몰아 갔던 것은 아니다. 부모나 처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오랫동안 우리를 공포와 슬픔으로 떨게 하였다.

어느 해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 옆 동네에 사는 언니가 무너진 한옥 기둥들 사이에 하체가 눌린 채 갇힌 일이 있었다. 언니는 끼어 있는 다리를 도저히 빼어낼 수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몸을 자해하다가 실신하여 실려 왔었다. 그날 바로 옆집 병원에서는 그 언니의 울부짖음이 밤새도록 짐승 소리처럼 벽을 흔드는 듯했다.

섬마을에 연중행사처럼 찾아드는 태풍과 장마가 가라앉고 나면 곳곳에 무너진 담벼락이나 쓰러진 집들을 다시 짓고 엉망이 된 논과 밭을 돌보느라 온 동네가 공사판처럼 어수선했다. 여기저기서 찾아내 놓은 장도리, 톱, 망치, 삽, 곡괭이, 호미 등. 마루 밑이나 창고 속에 숨어 있던 연장들이 때를 만난 듯 모두 튕겨 나왔다.

오빠는 그것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다리 건너편 봉구아저씨의 대장간을 찾아갔다. 나는 오빠를 따라 대장간에 가기를 좋아했다. 장마철에 녹슨 연장들 부러진 낫자루들이 흩어져 있는 어수선한 대장간이지만 이곳에서 낡은 것들이 새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신기했다.

이글거리는 풀무 속으로 쇠붙이들이 하나둘씩 들어간 후에는 빨갛게 달궈져서 봉구아저씨의 불집게에 잡힌다. 아저씨는 용접용 마스크를 쓰고 큰 쇠망치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두들기기 시작한다. 쇠붙이들이 수없이 곤장을 맞은 후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면 짙은 쇳물 냄새와 진한 수증기를 뿜어낸다. 불 속과 물 속을 반복하며 오가는 사이에 어느새 부실했던 모든 것들이 새것이 되어 눈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곤 했다. 너무도 신기했던 것은 반 토막이던 호미와 괭이가 멀쩡하게 붙어서 나오는 것이었다.

부러진 것을 붙여 놓기도 하지만 반쪽만 가지고도 두들기고 늘려서 똑같은 연장이 만들어지다니, 정말 대장간은 창조의 공간이며 꺾어진 뼈와 살을 붙여 주는 연장 병원인 동시에 회복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슨 쇠토막은 수천 도의 온도에 자신을 내던진다. 그 풀무 불 속에서는 그 무엇이라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강한 철이라도 녹아지고 유연해지면 휘어지고 그래서 반 토막 난 것이라도 하나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즈음은 고향에 가도 대장간을 볼 수가 없다. 그 어디서도 옛날 봉구 아저씨의 쇠망치 소리는 다시 들을 수가 없다.

장마나 태풍 한발 같은 천재지변은 자연의 질서만 허물어 버리고 의미 없이 떠나 버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부러진 칼이 새것이 되어 나오고 녹슬어 버려졌던 것들이 새 생명을 얻은 것처럼 파괴는 다시 무엇인가를 복원해 주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딴섬에서 가난으로 굳어지고 메말라 버렸던 인심도 천재지변 앞에서는 하나로 묶여 합심하고 울력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자라면서 절박한 위기의 뒤편에는 손을 뻗어 오는 따뜻한 인정이 있다는 사실을 많이 체험하였다.

가난하던 고향 사람들은 흉년에도 제 몸과 제 가족만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생명줄 같은 몇 홉의 곡식이라도 나누어 먹을 줄 알았다. 그들은 마치 풀무 속의 고난을 통과한 연장과 같이 태풍을 이기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할 줄 알았다.

근래 들어 지구촌 여기저기서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 풍요의 시대라고는 해도 기아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오늘 문득, 어린 시절의 고향, 봉구아저씨의 대장간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른다.


<침례의 날>

생명의 비
황금비가 주룩주룩 쏟아진다
쩍쩍 갈라터진
논바닥과 밭이랑
빗물이 금새 흥건하다
목마른 저들의 아우성
하늘로 치솟아 올랐을까
해갈을 위한 고마운 단비
허기진 목마름의 한숨소리에
주인은 눈짓으로 명령 하셨을까

꿀꺽꿀꺽 물 마시는 소리,
누렇게 시든 잎들이 빵긋 깨어난다
저들의 애절한 호소가
하늘에 닿았나보다
누군가 너희를 지키는구나
누군가 너희를 보고 있었구나
빗물 쏟아 부어 단체 침례 하시는가
창조주께서 베푸신 침례의 날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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