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침공한 이스라엘이 엊그제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한데 이어 하마스도 조건부 휴전을 발표했지만 전쟁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언제 다시 포성과 포연에 휩싸일지 모른다. 지난달 27일부터 시작된 전쟁의 참화는 형언하기 어렵다. 서울의 절반 크기인 그 좁은 땅덩어리에서 민간인 살육이 거의 매일 자행돼 왔다. 더 이상 피할 곳도, 숨쉴 곳도, 그리고 주검을 묻을 곳도 없다는 외신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무차별 대학살의 현장이 바로 그곳이었다. 22일간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1300명, 부상자는 5000명을 넘었다. 대부분 무고한 민간인이다. 희생자 가운데 연약한 어린이가 3분의 1이나 된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전쟁의 와중에서 공포감에 짓눌린 아이들은 밤을 두려워한다. 매일 악몽에 시달린다. 활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말수도 적어진다. 놀란 아이들은 부모의 품속만 찾는다. 이처럼 끔찍한 상황에 처한 아이들은 평생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이들의 상처를 누가 보듬어줄 것인가.

외신이 전하는 참상은 특히 현장 사진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팔다리가 절단된 아이를 품에 안고 울부짖는 가족들,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시뻘건 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아이들, 하얀 천에 싸인 어린 주검을 안고 오열하는 부모들…. 눈물의 장례식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각종 인권유린 만행은 용납할 수 없는 전쟁범죄다. 막바지 공세에 나선 며칠 전에는 민간인 700여명이 피신해 있는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기구 본부와 병원까지 무차별 폭격했다. 국제사회의 분노와 비난 여론은 안중에도 없다는 얘기다. 나치 치하에서 대학살(홀로코스트)의 아픔을 겪었던 유대 민족이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워 유사한 범죄를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따름이다.

미국의 책임도 크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물론 상·하원이 잇달아 하마스의 로켓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슈퍼파워 미국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독주에 제동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인데 이스라엘 역성만 들어주고 있으니 그 횡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의 어정쩡한 태도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침묵으로 일관하다 유엔 학교가 공습을 당하자 "민간인 희생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는 원론적 발언만 했을 뿐이다. 게다가 오바마는 대선 후보 시절 이스라엘이 강공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빌미도 제공했다. 지난해 7월 이스라엘 방문 당시 "내 두 딸이 잠든 집에 누군가 로켓탄을 쏘아댄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을 것"이라는 발언으로 이스라엘을 거들어준 바 있다.

오바마는 내일 '자유의 새로운 탄생'이란 주제로 취임식을 갖고 미국의 제44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대선 과정에서 유권자, 아니 전 세계를 향해 외친 '변화'라는 구호가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다면 취임 이후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정도다. 그래야 부시 집권 8년간의 일방주의 외교 유산을 청산하고 온 세계가 기대한 '지구촌 대통령'으로서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

취임 이후에도 유대계의 영향력에 발목을 잡혀 이스라엘에 대해 할 말을 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부끄러운 역사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가자지구에 봄날은 진정 올 수 있는지, 오바마의 향후 행보를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박정태 국제부장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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