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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김진홍] 처세의 달인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483년 태어난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격동하던 르네상스 시대에 절묘한 처세술로 최고행정관을 비롯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권력과 부를 함께 거머쥔 인물이다. 물론 탁월한 능력이 뒷받침됐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압축해 '처세의 지혜(Ricordi)'란 처세술의 고전을 남겼다. 그는 후손들에게만 이 책이 전해지길 원해, 책이 일반에 공개된 시점은 그가 숨진 지 300여년이 지나서였다.

바로크 음악의 거장 헨델도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자신을 미워하던 영국 국왕 조지 1세에게 수상음악을 만들어 들려주며 환심을 얻은 처세의 대가라고 한다. 난세를 헤쳐나간 유비와 조조 등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도 처세의 달인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세의 달인이라는 말이 수없이 오르내렸다. 대표적 케이스가 고건 전 총리. 2003년 노무현 정부 첫 총리로 지명되자 당시 야당은 국회의원과 내무·교통부 장관,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그를 처세의 달인이라고 몰아쳤다. 2007년 그가 대선전에 뛰어들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노태우 정부 때부터 승승장구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도 처세에 능하다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붙어다닌다.

이명박 정부 들어선 한승수 총리가 공개석상에서 처세의 달인이라는 질타를 받았다. 지난해 11월 국회 대정부질문에 나선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한 총리에게 "외교부 장관, 유엔총회 의장을 지낸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대북 포용정책을 반대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고 하더니 이명박 정부 총리가 되셨으니 참으로 처세의 달인"이라고 꼬집었다.

그제 신임 주미대사로 내정된 한덕수 전 총리의 경우도 내정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처세의 달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노무현·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 경제부총리, 총리를 역임한 것을 빗댄 말일 것이다.

처세의 달인이라는 말에는 변절, 기회주의자라는 부정적 의미가 함축돼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게 아닌 듯하다. 특정 정권에 과잉 충성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만큼 자기 업무영역에서 실력을 묵묵히 쌓아온 점은 공직자들이 충분히 배울 만하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이 덕목이던 시대도 아니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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