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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만큼 일화가 많은 인물도 드물다. 그 중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교훈적인 일화가 있으니 이른바 '빈대 스승론'이다. 그가 가출해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할 때였다고 한다. 빈대 천지인 노동자 합숙소에서 살을 뜯기고 피를 빨리는 날이 계속되던 중, 한번은 꾀를 써서 밥상 위에 올라가 잤단다. 그런데 잠시 뜸하다 했더니 이내 빈대가 밥상 다리로 기어 올라와 물어뜯기 시작하더라는 것.

다시 머리를 써서 이번엔 밥상 다리 네 개 밑에 물 담은 양재기 넷을 놓고 잤단다. 밥상다리를 타는 빈대를 익사시키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도 빈대의 공략을 막을 수 없었단다. 빈대가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정주영의 몸 위로 툭 떨어져 목적을 달성하더라는 것이다.

정주영은 하찮은 빈대도 인간의 피를 빨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면서 전심전력하는데 인간이 빈대보다 못해서야 쓰겠느냐는 생각에 더욱 맹렬한 자세로 사업을 일구게 됐다고 한다.

몸길이 5㎜ 안팎으로 비교적 고등 곤충에 속하는 노린재목 빈대과의 빈대. 특유한 악취를 풍기며 낮엔 장롱이나 벽장 틈새에 숨어 있다 밤에 주로 활동하는 이 해충은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 밀착해 있던 흡혈 곤충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거나 '빈대도 낯짝이 있지' 등 빈대의 해악을 부각시키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가 하면 남에게 염치없이 기대는 행위를 '빈대 붙는다'고도 한다.

먹고살기 힘들어 가뜩이나 어려운데 빈대에게 피까지 뜯기고 살아야 했던 지난날, 우리는 다각도로 '빈대와의 전쟁'을 벌였지만 좀체로 박멸하지 못했다. 빈대가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것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달러에 도달했을 즈음으로 기억된다.

그런 빈대가 최근 서울에 다시 나타났다. 전문가들의 경로 추적 결과 빈대가 창궐하고 있는 미국 뉴저지산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6·25전쟁 시절은 물론이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는 DDT 등 해충구제용 화학약품으로 빈대를 비롯해 이·벼룩 등 해충과의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구제용 약품은 미제였다. 그런데 이제 미국산 빈대가 역수입되다니 격세지감과 함께 묘한 기분이 든다.

윤재석 논설위원 jesus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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