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김상온칼럼

[김상온 칼럼] 한국에서 고생하는 민주주의

[김상온 칼럼] 한국에서 고생하는 민주주의 기사의 사진

“중요한 것은 ‘제도 정신’이다. 이젠 민주주의 제도의 내면화를 이뤄야 한다”

유신 시절, 정치학개론 시간이었다. 민주주의의 여러 형태에 관해 강의하던 스승이 씁스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용서하시오. '한국적 민주주의'는 그냥 넘어갑시다. 다들 알 테니…"

느닷없이 그 옛날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며칠 전 외신보도 탓이었다. 중국 공산당 권력서열 4위라는 자칭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의 발언. '다당제나 3권분립 등 서구식 민주주의는 중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잘못된 것들이다. 중국은 공산당의 우월적 지배를 통한 통치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언필칭 공화제나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반감을 보이거나 자의적인 변형을 시도한 것은 현재의 중국이나 유신시절의 한국만이 아니다. 1992년의 태국 민주화운동을 이끌었고 최근 격렬한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주도한 국민민주주의연대(PAD) 소속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유럽이나 미국식 민주주의를 기대해선 안 된다. 우리는 우리만의 동양적(Oriental)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를 두고 이달 초 흔들리는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는 왜 악전고투하고 있는가(Why democracy is struggling in Asia)?' 한국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표지 사진이 국내신문에 실리면서 국민의 낯을 뜨겁게 했던 그 기사다.

타임은 이 기사에서 북한 중국 미얀마 같은 '비민주국가'들은 차치하고 명색이 민주주의를 한다는 아시아 각국에서 민주주의가 왜, 어떻게 도전받고 있는지를 분석했다. 그리고 그 국가들 가운데 한국도 포함시켰다. 하긴 주위를 둘러보면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국회에서 벌어진 행태는 말할 것도 없다. 민주주의적 절차와 방법을 무시한, 민주주의의 숨통을 틀어막는 불법 가두시위 등 반민주적 폭력행위가 판을 친다. 급기야 엊그제는 그 와중에서 소중한 생명들까지 희생됐다.

타임은 이같이 취약한 아시아 민주주의의 문제점으로 역사가 일천하다는 것 외에 네 가지를 들었다. 우선 지도자를 전능한 통치자로 보고 과도한 권력을 위임하는 유권자들의 태도. 이 경우 국민은 시민이 아니라 신민(臣民)에 가까워지며, 반정부 행동에 나설 때는 혁명을 방불케 하는 극단적 가두시위로 폭발한다.

둘째, 일당 장기집권이나 특정 지도자 가문이 대대로 득세하도록 유권자들이 용인하는 왕조적 민주주의. 셋째, 선출된 지도자를 견제할 수 있는 사법부 등 독립적 기구의 위축. 넷째, 스스로 지지했던 '선거 정치'를 공격하는 시민사회의 미성숙.

대체로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이 원래 서구사회의 산물인 민주주의를 형식만 받아들인 데서 문제가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민주주의를 하나의 제도라고 할 때 제도 이식 자체에 치중한 나머지 제도를 구성하는 '제도 형식'과 '제도 정신' 중 후자를 간과해왔다는 얘기다.

사실 민주주의가 지금 같은 모습을 이루기까지는 그것을 가능케 한 정신이 있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라든가 서로 다른 의견을 관용하는 정신, 다수결의 정신, 타협과 이해 또는 양보의 정신 등. 어차피 민주주의를 우리 삶의 원리로 받아들인다면 이제 우리도 제도 정신에 주목해 외형적 민주화를 넘어 내면적 민주화,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내면화를 이룰 때가 됐다. 언제까지 '민주주의가 한국에서 고생한다'는 비아냥을 들으려 하는가.

김상온 논설위원 soki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