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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기석] 일사불란을 경계하라

[시론―김기석] 일사불란을 경계하라 기사의 사진

"동양의 어느 현자는 매일 기도할 때마다 자기로 하여금 흥미로운 시대에 살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자가 못 되는 우리는 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지라 흥미로운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베르 카뮈가 1957년 12월14일 스웨덴 웁살라대학에서 행한 강연의 첫 부분이다. 그 이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 세상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곳이 되고 말았다.

행인가, 불행인가? 삶이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세상은 술명하고 조촐한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산다 해도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은 마치 먼지처럼 덧쌓여 우리 마음의 안식을 방해한다. 영문도 모른 채 토끼 뒤를 따라 질주하는 우화 속의 동물들처럼 우리는 갈 곳을 알지 못한 채 질주한다. 숨이 가쁘지만 멈추지도 못한다. 모두가 들떠 있다. 흥분상태다.

차이를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그 때문인가? 오가는 말들이 거칠기 이를 데 없다. 말은 더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지 못한다. 막힌 것은 트고, 갈라진 것을 잇는 게 소통이라면 이 시대는 불통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바다에 이르지 못한 채 잦아드는 강물의 슬픔처럼, 상대의 가슴에까지 당도하지 못하는 말처럼 슬픈 것도 없다.

설날을 앞두고 매스컴은 가족 간의 우애를 확인해야 할 소중한 시간에 '설화(舌禍)'를 피하기 위해서는 정치문제를 화제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권했다. 정치는 그처럼 예민한 사안이다. 상명하복의 유교적 질서에 익숙한 탓인지 우리는 다양한 견해를 견디지 못한다. 견해 차이가 생기면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치환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화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서로의 성격일 뿐이다. 자아가 강한 사람일수록 다양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남을 지배하거나 조종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태도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고, 그런 만큼 소통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진다. 할 말만 있고 들을 것은 없다는 듯이 처신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다. 계몽된 사람은 '차이'를 오히려 성찰의 계기로 삼는다. 낯섦은 편협한 자아를 허물고 더 큰 자아를 얻으라는 초대이니 말이다. 이것은 개인의 경우에도 해당하지만, 모듬살이의 현장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파시즘에 저항했던 이탈리아 작가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는 화학의 주기율표로 자기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아연은 황산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 어떤 결합도 완강하게 거절한다. 레비는 여기서 하나의 철학적 성찰을 이끌어낸다. 때로 우리 생에 변화를 가져오고 생명력을 주는 것은 불순물일 때가 많으며, 불일치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순수'는 파시즘으로 귀착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의 통찰과 경고가 더욱 불길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어쩌면 모든 가치를 '경제 살리기'라는 말로 뭉뚱그리는 오늘의 상황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일치와 다양성을 인정하자

정치란 어쩌면 대립적인 요소들을 잘 버무리고 조화시켜 창조와 변혁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국민들을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 발전의 성숙한 주체로 인정한다면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미네르바가 체포되고 사이버 모욕죄를 포함하는 정보통신법 개정이 예고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까닭은 여기 있다. 감시당하고 의심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사람은 공익을 위해 헌신하기보다는 사적 이익을 위해 복무하기 마련이다.

"여울 속의 고기까지 뚫어보는 것은 불길한 일이다. 남의 비밀까지 밝혀내는 재간에는 화가 미친다"는 주나라 때 속담이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오는 오늘이다. 입춘이 머지않은 오늘, 해동머리에 들뜬 보리밭을 밟아주는 농부의 정성처럼 우리의 부풀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줄 이가 그리운 것은 왜일까?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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