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포럼―엄정식] 자유의 두 의미 기사의 사진

요즈음 '자유'라는 단어처럼 많이 쓰이는 말도 없을 것이다. 세계사가 자유를 확장해온 과정이라면 현대야말로 인류 문명의 발상 이래 가장 많은 자유를 누리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신라의 서라벌이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사람들보다 더욱 자유로운지 해명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자유'라는 말이 애매하게 쓰이기 때문이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상식적으로 우리는 억압이나 명령, 혹은 강제나 구속을 받지 않을 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나는 점심시간에 식당에 들러서 비빔밥을 먹을까, 갈비탕을 먹을까 망설일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음식값을 지불할 충분한 양의 돈이 있고, 또 두 가지 음식이 모두 준비되어 있다고 하자.

이 경우 나는 '자유롭게' 비빔밥이나 갈비탕을 선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의 자유를 '행동의 자유'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나를 방해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나의 행동을 막지 않을 때 누리는 상태가 자유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구하는 자유도 주로 이 행동의 자유다. 이러한 의미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부지런히 노력하며 그 대가로 명예나 권력, 혹은 재화를 획득하고자 한다.

한편 아무리 행동의 자유를 누린다 해도 어쩐지 답답하고 불안한, 심지어 가슴이 터질 듯한 압박감마저 느낄 때가 있다. 가령 내가 식당에서 갈비탕 을 맛있게 먹은 다음 주인이 잠시 자리를 떠난 사이 슬쩍 도망쳐 나왔다고 하자. 주인은 나를 기억할 수 없고 어떠한 감시의 장치도 없었으므로 적어도 행동의 차원에서는 나를 억압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과연 나는 진정한 의미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다른 의미의 '자유'가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강제와 억압을 벗어난 자유가 아니라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욕정과 충동을 이겨낸 자유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를 누리려면 권력이나 명예, 재화 등 외면적인 힘이 아니라 온갖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내면적인 힘, 즉 강한 의지력 혹은 도덕력이 요구된다. 이와 같이 동물적인 충동과 욕구를 이겨내고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의지의 자유'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행동의 자유와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인류문화사를 돌이켜보면 자유에는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길이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행동의 자유를 누리고자 외부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정복자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의지의 자유를 얻고자 광활한 내면의 세계를 헤매는 은둔자의 길이다.

아마 우리는 알렉산더 같이 위대한 정복자가 될 수 없듯 디오게네스처럼 극단의 은둔자가 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욕구를 충족시키고 절제를 배우며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이 주로 행동의 자유를 추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는 사실에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 한 또 행복을 얻으려는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려고 하지 않는 한 우리들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유일한 자유라고 언명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행동적 차원에서 자신의 자유를 추구할 권리와 의지적 차원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할 의무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의지의 자유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삶이 무미하고 건조한 것처럼 행동의 자유만을 부각시키면 무모하고 위태롭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가 내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도덕력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의 축복과 과학기술의 혜택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엄정식(서강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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