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풍 언어유희·날카로운 세태 풍자… 보리스 비앙 소설 ‘세월의 거품’ 기사의 사진

'세월의 거품', 이 향수 어린 제목의 소설은 프랑스 작가 보리스 비앙(1920∼1959·사진)의 대표작으로 출간 이래 300만부가 팔린 스테디셀러다.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이유는 현대 소설에 영감을 주는 동시에 프랑스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평론가, 번역가, 작사가, 재즈음악가이기도 했던 비앙 특유의 언어유희가 유려하게 펼쳐지면서 소설은 어느덧 시적이고 음악적인 영역으로 나아간다. 우선 작가 서문부터 범상치 않다. "오직 두 가지뿐이다. 어여쁜 처녀들과의 사랑 그리고 뉴올리언스나 듀크 엘링턴의 음악. 그 나머지는 사라져야 할 것이다. 추하기 때문이다."(9쪽)

서문에서 밝혔듯 사랑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주인공 콜랭은 별다른 걱정 없이 재즈와 쾌락에 탐닉하는 유한 청년이다. 콜랭은 한 파티에서 클로에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그가 즐겨 듣는, 듀크 엘링턴 편곡의 '클로에'와 같다. '클로에'는 '늪의 노래'라는 부제가 달린 곡으로 부드럽고 관능적이며 애조를 띤 곡이다. 비앙은 이렇게 음악적 모티브를 통해 처음부터 여주인공 클로에의 성격과 운명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안녕하……듀크 엘링턴이 당신을 편곡했나요?"(49쪽)

콜랭과 클로에는 가장 먼저 나타난 인도를 따라 걷는다. 그때 작은 장밋빛 구름 한 조각이 하늘에서 내려와 말을 건다. "구름이 제의했다. 나 갑니다!"(61쪽) 구름에 싸인 콜랭은 계피 향을 넣은 설탕 냄새를 맡는다. 하지만 클로에가 폐에 꽃이 피는 병에 걸려 점점 시들어가고, 콜랭은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가진 재산을 탕진하고도 모자라 육체노동까지 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비앙의 문학적 상상력은 절정에 이른다."만약 수련이 꽃을 피우면 다른 수련들이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수련이 꽃을 피우도록 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167쪽)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 문장이 당대 최고의 실존주의자인 장 폴 사르트르를 차용한 언어유희임을 간파할 것이다. 폐병이야말로 육체를 사그라지게 만드는 질병이지만 한편으로 클로에에게는 실존의 수단인 것이다. 하지만 비앙이 언어유희를 비틀고 있는 것은 실존주의 자체가 아니다. 비앙은 산업사회, 관료주의에 대한 냉소적인 풍자도 빠뜨리지 않는다. '세월의 거품'이 1947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회와 체제에 대한 비앙의 이런 풍자적 비판은 다가올 현대 사회의 병폐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정철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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