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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절 휴가에 들어간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외국 기자들은 24일부터 27일까지 쉬기는커녕 문제적 인물을 쫓아 공항과 호텔에 진을 쳐야 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베이징에 나타난 것이다. 나흘 동안 세 차례 기자들과 마주친 김정남은 후계자 질문에 "아버지가 결정할 일"이라면서 모르쇠로 일관했다.

왕조의 후계자 결정은 민주국가의 선거 못지않게 복잡하며 스릴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왕위 계승은 청나라에서 일어났다. 61년간 재위한 명군 강희제의 말년 고민은 후계자 문제였다. 북방민족의 상속 방식은 장자를 우대하는 농경사회 중국과 달랐다. 인구가 귀한 여진족은 적자와 서자를 차별하지 않았고 실력 있는 아들이 아버지 뒤를 이었다.

강희제는 처음에 아들 35명 중 둘째를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자주 속을 썩이고 파벌까지 생기자 폐위해 버렸다. 강희제는 열넷째를 총애했지만 다른 왕자들도 왕족과 대신들의 지원을 받으며 아버지의 신임을 얻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강희제의 죽음은 급작스레 찾아왔다. 강희제는 유일하게 임종한 처남의 손바닥에 붓으로 '四'자를 썼다. 이에 따라 황제가 된 게 넷째 옹정제다.

그런데 강희제는 '十四'라고 썼으나 넷째와 한 편인 처남이 혀로 '十'자를 지웠다든가, 손바닥을 오므려서 '四'자만 보이게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옹정제는 차후의 말썽을 없애기 위해 후계자 이름을 넣은 함을 자금성 건청궁의 편액 뒤에 두고 자신의 사후에 공표하라고 명했다. 이 태자밀건(太子密建)법은 청 말 서태후가 나타날 때까지 유지됐다.

조선 태조 이성계도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8명의 아들이 이복 간, 동복 간 혈투를 벌인 끝에 다섯째 방원이 형 정종을 밀어내고 태종이 됐다. 태종 뒤를 이은 세종도 셋째다. 조선 왕실의 적장자(嫡長者) 후계 관행은 조카 단종을 쫓아낸 세조 이후에 정착됐다. 조선인과 여진족이 혼거하던 함경도 영흥에서 일어난 북방 군벌 이성계의 집안이 여진족인 청나라 왕실과 후계 방식이 닮은 점은 흥미롭다.

북방의 눈으로 본다면 북한 후계자 문제에서 장남, 적서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김정남의 말대로 아버지가 결정하거나, 아니면 힘과 꾀로 쟁취하거나.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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