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너머] 2부 南村,근대의 엘레지 ③ 묵적동 허생의 쇠락

[공간+너머] 2부 南村,근대의 엘레지 ③ 묵적동 허생의 쇠락 기사의 사진

가난한 선비 글읽는 소리… 어수선한 시류에 묻혀

요즘 젊은 데이트 족들은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하거나 복합상영관에서 커플 팝콘을 씹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하루종일 문자를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절단'낸다. 족욕을 함께 하는 웰빙 족욕 카페를 가거나 놀이동산의 놀이기구를 타기도 하는데 어떤 경우엔 TV에서 본 것처럼 연인을 위해 깜짝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한다.

‘서프라이즈∼’ 1980년대, 젊은 연인들이 데이트를 할 만한 장소는 딱히 없었다.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 옛 궁궐을 함께 걷거나 종로 서적 앞에서 만나 주변을 배회하거나 음악 감상실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죽이는’ 것이 다였다. 오죽하면 창경궁 밤 벚꽃미팅이 있을 정도였겠는가.

그 중에서도 남산은 중요한 데이트 코스 중 하나였다. 서울에 남산이 없었다면 80년대 젊은이들은 더 많은 화염병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했다. 서울에는 한강이 있고 '안산(案山)'으로서 '남산'이 있다. 남산은 80년대 말 한강이 개발되기 전에 서울 시민들에게 중요한 쉼터였다. 남산은 서울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면서 앞으로는 경복궁, 창덕궁 왕조의 기운과 대면하는 도성의 건너편이다. 조선시대 청계천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으로 구분하였고 북촌은 권세있는 귀족이 살고 남촌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들이 모여 살았다.

남산 계곡에 사는 이들을 남산골 샌님, 남산골 딸깍발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가난하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사는 선비를 가리킨다. 어떤 때 조정의 실책에 대하여 크게 비판하고 쓴소리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남산일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임금이 있는 경복궁에까지 들렸다 한다. 박지원의 한문소설 '옥갑야화'에서의 주인공인 '허생'이 '묵적동'(묵동)에 사는 가난한 선비의 전형이다. 허생은 남산 밑에 해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사립문이 열려 있고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초옥에 살았다.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여 그의 처가 바느질을 해서 겨우 먹고 살 정도였다.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의 최상지는 경복궁이고 다음이 창덕궁이니 이 궁궐을 연결하는 북악과 응봉 선상지역, 산기슭 남쪽 율곡로 일대가 주거입지로 최적이라 할 수 있다. 양지 바르고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 되고 남쪽이 트인 곳. 권문세가들이 북촌에 모인 것은 궁궐이 가까이 있다는 것도 이유는 이유겠지만 자기들끼리 정보 교환이 가능하고 지배를 합리화 장기화하기 위한 유대를 공고히 하기 가장 적합한 곳이기도 했던 셈이다.

이에 반해 남촌은 음지이며 저지대여서 배수가 잘 되지 않아 비만 오면 진흙구덩이가 되고 여름철에는 개천의 악취가 퍼지는 곳이었다. 이 뒷골목에 서민들의 집에 끼어 빈한한 선비들의 가옥이 섞여 있었다. 이들은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 하여 '딸깍발이'라 불리게 되었다. 남촌이 조선시대 왕궁에서 멀다는 이유로 재야선비들의 거주지가 되었다면 같은 이유로 일제 당시 일본인의 거주지가 되었다. 조선말기 일본 세력은 조선 조정이 외국인 한성 거주를 저지하자 궁궐에서 먼 남산 언저리에 정착할 권리를 부여받는다.

남산골은 일인 중심 거주지가 되면서 상권, 행정, 유흥업의 중심지가 된다. 해방 후 회현동 일본 소유건물은 일반인에게 불하되거나 공매되었고 남산일대에는 단독주택 일부와 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서울을 이렇게 북촌, 남촌으로 이름지어 구분한 것은 권문세가들이 남촌을 비하하여 북촌과 구분짓기 위해 그리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일제 식민지 당시 일본은 조선 왕실 사람들에게 남산의 신사(지금 남산 도서관 자리)를 향해 참배토록 강요하여 조선 왕실은 하루에도 네다섯 번씩이나 남산을 향해 참배했다는 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소외된 선비들의 자리였던 남산은 일제 당시 일인들의 중심지가 되고 해방 후 일인이 떠난 후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접수된다. 독재정권 때 '남산 밑으로 끌려간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공포의 전언이었다. 남산의 지하는 독재정권 당시 '고문'과 '린치'의 공간이었다.

지금 남산에는 여러 가지 시설이 있다. 서울 타워와 남산 도서관, 유명한 돌계단, 남산 식물원, 안중권 의사 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케이블카, 팔각정, 회전식당이 있다. 남산 제 모습 찾기 운동은 1998년 4월 '한옥마을'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서울 사대부의 삶과 건축양식을 볼 수 있도록 한옥을 복원하고 야외 공연장을 만들어 한마당 놀이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남산골 선비 모습 복원을 위해 만든 한옥 마을은 다시 봐도 좀은 생뚱 맞아 보인다. 남산 기슭은 이미 퇴계로가 생기면서 허리가 잘리고 1978년 남산 3호 터널이 뚫리면서 동강이 나 버린 데다 지금은 고층 빌딩에 둘러 싸여 있다. 고층 빌딩 밑에는 녹슨 에어컨을 단 보신탕 집 창문에다 단체손님을 받는 싸구려 한식집, 만두집, 선술집, 구멍가게, 싸구려 여인숙과 허름한 교회가 함께 놓여 있고 퇴락한 아파트와 시멘트가 부서진 가파른 계단 위에는 서울 타워가 방정맞은 남근처럼 솟아나 있다. 상권이 강남으로 이동하고 명동과 남대문 상권이 쇠락하면서 남산기슭의 혼란스러움은 더해간 듯하다.

가난한 선비들 글 읽는 소리가 우렁차던 곳, 지조높은 선비들이 나막신을 신고 딸깍거리며 다니던 남산은 일제 때 일인들의 주거주지가 되다가 해방 후 독재정권하 음지의 아지트가 되다가 어수선한 개발의 혼란 속에서 퇴락해 갔다. 그러니 남산 한옥 마을은 쇠락한 도심 개발지에 기이하고 불안정하게 놓인 '삑사리'쯤 된다.

고층건물과 함께 놓인 쇠락한 다주택, 싸구려 구멍가게와 식당들,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시멘트가 부서진 벽과 계단, 이제 남산은 한옥마을을 시작으로 스스로 '지력'을 회복하면서 도심 안에서의 새로운 전통 성립과 해체를 구축해야 할 듯하다.

한때 대학 다닐 때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선 서울을 향해 돌멩이를 힘껏 던지기도 했다. 설명할 수 없는 격정 같기도 하고 분노 같기도 했다. 땀 뻘뻘 흘리면서 올라가선 소리라도 외치고 나면 세상에 대한 모멸과 굴욕이 씻기는 듯도 했는데. 미팅한 남자애와 남산에 오르면서 처음으로 부끄럽게 손을 잡기도 했는데. 이제는 분노를 삭힐 곳도 연애를 즐길 곳도 너무 많고 넘쳐나서 사람들은 남산이 있는지조차 까먹었는지 모르겠다.

글 김용희

1964년생. 이화여자대학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 졸업. 92년 계간 '문학과 사회'로 문학평론가 데뷔. 현재 평택대 국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 저서 '페넬로페의 옷감짜기-우리시대 여성시인' '우리시대 대중문화' '천개의 거울-김용희의 영화읽기' 등이 있다.

그림 강철기

1965년생. 추계예대 서양화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졸업. 2009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최우수상 수상. 국민일보현대미술초대전, 한국미술의 빛 초대전 등 단체·기획전 250여회. 서울 베이징 나가사키 등서 개인전 16회. 현재 추계예대 겸임교수. 한·일 미술교류회 이사.

제 벼슬 못해도 남의 벼슬은 뗀다,남산골 샌님

'남산골 샌님'이란 얘기가 있다. 조선시대 벼슬 못한 양반과 그들이 사는 곳을 일컫는 말로 흔히 '딸깍발이(비 올 때나 신는 신)'라 불렀다. 벼슬은 못했으나 비판 정신과 기개 있는 성품을 갖춘 이들이었다. 그래서 '제 벼슬은 못해도 남의 벼슬은 뗀다'고 할 만큼 야당 정신이 강했고 상소문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냈다. 박지원 소설의 주인공 허생도 남산골 샌님이었다. 실재 인물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유성룡 이순신 허균 같은 이들은 벼슬을 했지만 기개가 높았다. 모두 남촌에 살았다. 따라서 허생과 같은 남산골 샌님이란 말에는 조선의 기개가 담겼다. 한데 이들은 현실 감각이 없었다.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며 명동에서 자결한 민영환도 국제정세를 읽지 못했다. 결국 일제는 이들을 밀어내고 북촌 대립 개념의 남촌을 수탈의 본거지로 삼기 시작했다.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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