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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9월10일은 과학수사 시대가 활짝 열린 날이다. 영국 레스터대학 유전학 교수인 알렉 제프리 박사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DNA에 있는 유전자 배열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차이를 이용해 동일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규명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이름하여 ‘DNA 지문(fingerprinting)’이다.

DNA 지문은 연쇄 강간살인범을 가려내는 데 처음 사용됐다. 83년과 86년 제프리 박사가 살던 레스터시 근교에서 두 명의 10대 여학생이 성폭행당한 뒤 목 졸려 숨진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경찰은 범인의 정액을 통해 혈액형이 A형이라는 것을 알아낸 뒤 성추행 전과가 있는 마을 청년을 용의자로 붙잡아 추궁했다. 그리고 제프리 박사에게 DNA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용의자는 무죄라는 게 밝혀졌다. 경찰의 강압수사로 하마터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사람을 구해낸 것이다.

이후 경찰은 인근 주민들을 상대로 혈액을 채취하는 광범위한 수사를 펴 DNA 지문 대조를 통해 진범을 붙잡았다. DNA 지문이 범죄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동시에 무고한 사람의 혐의를 벗겨주는 역할도 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다.

DNA 지문 해독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지금은 심하게 훼손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거나 실종 아동 찾기, 친자 여부 확인 등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제프리 박사는 86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면수 유전자분석과장으로부터 관련 자료를 얻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는 선뜻 관련 논문 10여편을 부쳐주었다고 한다. 91년 DNA 분석실이 출범해 우리나라 과학수사가 발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셈이다.

이미 보도됐듯 강호순의 엽기적 살인행각을 밝혀낸 결정적인 단서는 점퍼에 묻어있던 ‘모기 눈물보다 적은 양의 DNA’였다. 강호순은 피해자 손톱에 행여 자신의 머리카락이나 피부조직이 묻어있을 것을 우려해 피해자 손톱 10개를 절단하며 완전범죄를 꾀했으나 결국 DNA 수사로 꼬리가 잡힌 것이다.

DNA는 말이 없다. 그러나 범인을 명확히 알고 있다. 강호순 사건을 계기로 ‘침묵하는 증인’ DNA에 대한 범죄자들의 공포는 더 커질 듯하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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