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인 1909년 10월25일, 서른살 청년 안중근은 긴 여정 끝에 하얼빈에 도착했다. 저녁 무렵,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지형을 익힌 뒤 동료 김성백의 집에서 묵었다. 권총을 넣은 양복은 고이 벗어 베갯머리에 두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하얼빈 역 근처 찻집에서 차를 마셨다. 자주색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 여성이 눈에 띄었다.

오전 9시. 일본 추밀원 의장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나타났다. 제국의 권력자를 위해 화끈한 환영식이 준비돼 있었다. 다만 그를 맞은 것은 풍악이 아니라 총성이었다. 안중근은 역사로 들어서는 이등을 향해 브라우닝 8연발 권총을 당겼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지 않은 채 세 발을 쐈다. 한 발은 어깨에서 가슴쪽으로, 또 한 발은 배꼽 부분에, 마지막은 복부를 지나갔다. 이등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 옆 사람에게 네 발을 쐈다. 빗나간 총알은 없었다. 아직도 1발이 남았다. 자결할 이유가 없다.

안중근은 쓰러진 이등을 보고 성공을 확인했다. 가슴에 성호를 긋고 외쳤다. “코레아 우라(한국만세)!” 우렁차게 삼창했다. 이등은 즉사하지 않았다. 병원에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으면서 30분 정도 연명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나를 쏜 자가 누구냐?” “조선놈입니다.” “바보 녀석…” 피를 토하고 절명했다. 저격 15분 만에 영문도 모른 채 숨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누가 이런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나. 10보 떨어진 거리에서, 삼엄한 경계망 속에서, 움직이는 표적을 명중시킨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담대한 희망’ 없이는 불가능한 이벤트였다. 이등의 처단은 한국독립운동사의 가장 빛나는 봉우리를 장식했다. 영웅은 그렇게 탄생했고, 올해 거사 100년을 맞았다.

“무협으로 평화를 지향한 위인… ‘칼의 노래’ 버금가는 ‘총의 노래’ 왜 없나”

이쯤에서 묻는다. 안중근을 얼마나 알고 있나. 테러리스트, 깍두기 머리에 콧수염, 손마디 하나 없는 서예가? 아니면 무식자, 수레 앞에 달려든 사마귀? 아니다. 그는 거대한 산맥이다. 골짜기도 깊다. 그의 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극단의 경지까지 연마하는 무인의 초상을 만난다. 법정에서 펼친 ‘동양평화론’을 읽노라면 아시아적 공동체의 미래와 동양평화에 대한 인문적 사고의 깊이에 놀란다. 완벽한 위인의 삶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기리는 데 실패했다.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추모한다며 머리를 조아렸지만 가슴에 품지 못했다. 마음은 겉돌고, 방식 또한 서툴렀다. 덩어리가 너무 커서일까. 알지 못하니 스며들지 못하고, 느낌이 없으니 상상력이 나올 수 없다. 문학의 책임이 크다. 서가를 채우는 책은 기껏 과장과 비약이 가득한 전기류 뿐이다. ‘칼의 노래’에 맞먹는 ‘총의 노래’가 없다. 이 정도 소재를 갖고도 명작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문학의 수치다. 문학이 죽을 쑤니 영화는 필패다.

올해 안중근을 생각하는 행사가 많다. 학술회의에서 특별기획전, 창작오페라, 뮤지컬 공연까지 다채롭다. 이 모든 프로그램은 장르는 달라도 살아 펄떡이는 안중근의 모습을 생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영웅을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눈을 감아도 위인의 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역사기행을 권하고 싶다. 안중근이 뜻을 세운 엔치아에서 블라디보스토크∼지야이지스고∼하얼빈∼여순(뤼순)으로 이어지는 험난한 길을. 나는 이 코스를 ‘위대한 여정’이라 부른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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