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너머] 2부 南村,근대의 엘레지 ④ 딴스홀

[공간+너머] 2부 南村,근대의 엘레지 ④ 딴스홀 기사의 사진

'지저부친 머리에 뾰족한 구두에 엄청나게 짧은 치마에 화장이상의 화장을 하고 겅중겅중 으쓱으쓱하며 댄스식 걸음걸이로 걸어가는'(방춘해 '가을거리의 남녀풍경' 별건곤1930년 11월호) 신여성, 소위 모던 걸은 어떻게 조선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오게 된 것인가. 갓 대신 중절모를 쓴 모던 보이는 어떻게 조선의 거리를 활보하게 된 것인가.

누구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지어 체포되고 독립군은 만주벌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고 독립투사는 식민조선의 원흉에게 도시락폭탄을 던지는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모던 걸과 모던 보이는 찻집 빙수집 우동집 카페 댄스홀의 샛노란 전등 아래서 칼피스, 아이스고히(아이스커피), 독주를 마시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모던 걸과 모던 보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이단적 타자인가.

식민 억압속 숨죽이던 욕망의 분출구

타자다. 분명. 1990년대 압구정동에 나타난 오렌지족처럼 모던 걸과 모던 보이는 경성 도심을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녔다. 남대문로와 엇갈리면서 경성 우편국 건물 양옆으로 뻗어 들어간 두 갈래 길, 도쿄의 번화가 긴자를 뺨치는 혼마치(충무로) 메이지마치(명동)의 불야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그 골목 길목 너머에 야한 화장을 하고 단발머리에 홀쭉 치마를 입고 원숭이 궁둥짝 같은 홍안을 한 모던 걸들이 파라솔, 양장 모자를 쓰고 돌아다녔다. 나팔통바지 통넥타이를 한 모던 보이들이 맥고모자를 쓰고 기모노, 지카다비를 착용한 일인들과 뒤섞였다. 농염한 여인같이 현란한 경성 우편국의 붉은 벽돌과 남촌 상점들. 전차 소리와 음반에서의 노랫소리, 밤이면 천만촉의 휘황 전등불과 화려한 광고판의 네온사인. 그렇다, '끔찍하고 설레는' 현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 떠들썩하고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모더니티는 식민지 조선에 '강력하고 위협적인 타자'다.

조선은 봉건적인 상황, 제조업조차 발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 소비적 유흥과 유행, 패션을 현대적 문화체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낡은 주체를 벗고 '새 좋은 것(현대, 서구)'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자유연애와 유행가, 카페와 극장, 그것의 의미는 곧 자유였다. 개인으로서의 자유, 자아의 개방과 개화였다. 이때 자유인으로서의 현대적 주체는 민족으로서의 주체와 부딪힐 수밖에 없다. 모던 걸과 모던 보이의 역설. 즉 식민의 억압을 받고 살아가면서 그 사실조차 잊고 자신의 욕망과 자유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욕망의 부딪침 말이다. 이 이중적 부딪침의 현장이 '딴스홀'이다.

'정신일도하사불성' '대동아단결' '정신대'. 일본은 조선을 '정신적 합일' 속에서 군국주의 파시즘으로 몰아가기만 했는데 욕망이라니 자유라니. 댄스홀은 바로 '개인의 육체'를 발견하는 곳이다. 육체의 발견은 곧 파시즘 식민주의에 대한 균열 내기이다. 이렇게 해서 '경박하고 소비적이고 자유분방한 불량소녀와 불량소년'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이단자로 탄생한다. '모던 껄' '모던 뽀이'는 조선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딴스홀에서 춤은 일종의 양춤이었다. '폭스' '퀵' '슬로' '원스텝' 그중에서 '스윙재즈'가 중심이었다. 서구와 일본에서 재즈가 유행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실제 조선 민중에게는 외국의 유행가도 아니고 조선의 민요에다 양악 반주를 맞춘 중간층의 비빔밥식 노래가 유행했다. 또 권번에 기적을 올린 기생들이 술과 웃음을 파는 것이 아닌 혹독한 훈련 끝에 시·화·가·무·악 등 예능을 익혀 여류 예술가로 전통춤을 이어갔다. 이렇게 보면 1930년대 경성은 권번의 전통 춤, 카페에서의 엔카, 스윙재즈 신식춤이 혼재해 섞여 있었다. 전통과 근대의 혼재와 혼합이 조선의 모더니티가 맞닥뜨린 곤혹스러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성에서 댄스홀은 처음부터 허용되지 않았다. 이에 1937년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과 영화배우 오도실, 기생 박금도 등 조선 여성 8명이 총독부에 '딴스홀'을 허락해달라는 청원을 낸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라는 글은 서양과 일본에서 유행하는 댄스홀조차 식민지 조선에서 통제되는 부당성을 설파하고 있다.

"삼교(三橋) 경무국장 각하여/각하는 댄스를 한갓 유한계급의 오락이요 또한 사회를 부란시키는 세기말적 악취미라고 보십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교 댄스조차 막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각하의 잘못 인식함이로소이다."(삼천리 1937년 1월호)

카페에서 추던 춤을 고급 사교를 위해 댄스홀에서 추게 해달라는 청원이었다. 총독부는 청원서에도 불구하고 댄스홀을 허가하지 않는다. 그러자 사람들은 카페에서 양춤을 추고, 추다 적발되어 잡혀가기도 한다. 이렇게 사교춤은 건전한 교양으로 보급되었으나 일본강점기에 접어들어 일체 금지되고 해방 후에도 허용되지 않는다.

50, 60년대 차차차, 맘보 등 댄스 열풍으로 무허가 교습소가 성행하고, 춤으로 70여명의 여성을 유혹했던 박인수가 등장, 70년대 '7공자 사건'으로 사교춤은 유교적 민족주의하에서 사회정화명분으로 대대적 탄압을 받게 된다. 경제개발정책 하에서 조국근대화를 수행해야 하는 조국현실에서 양춤을 춘다는 것만으로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회적 문젯거리였다. 단속정책 속에서 사교춤은 밀실문화로 전락, 카바레라는 위반과 금기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춤방은 춤을 춤추면서도 정을 통하는 짜릿한 공간으로 용도 변경된다. 1960년대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은 카바레에 대한 남성의 공포증을 극대화시켰다.

1990년대 들어 한국이 이념의 시대를 넘어 문화 취향의 시대를 맞게 되면서 춤방은 두 영역으로 나뉘게 된다. 카바레와 록카페(클럽). 둘 다 욕망이 들끓는 곳이지만 우리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카바레는 현모양처의 전통 이데올로기 속에서 철저하게 여성에게 주홍의 낙인을 찍는 칠거지악의 공간으로 게토화된 데 반하여 록카페는 젊은이들의 저항과 청춘의 특권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특징화된다. "딴스홀을 허(許)하라!"는 외침은 여전히 유효한가?

글=김용희(평택대 국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그림 문인상

1960년생. 추계예대 동양화과와 조선대 대학원 졸업. 개인전 15회, '찾아가는 미술관'전 등 단체·기획·초대전 500여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청주대·고신대 강사.

◇딴스,자유부인을 낳다

'카페에는 경쾌한 음악과 율동, 그리고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젊은이들의 육체가 있었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머물렀던 한 카페에 들어가서 보면… 웨이트리스의 어깨가 실록실록, 엉덩이가 꿈틀꿈틀, 전기장치에 놓인 인형과 가이 보기 싫은 肉魂의 율동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진다.'(잡지 '혜성' 1931년 11월호 '경성, 앞뒤골의 풍경')

1930년대 지금의 명동과 충무로는 재패니스타운이었다. 소비의 상징인 미스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과 조지아백화점(옛 미도파백화점) 건너편 길을 시작으로 서양식 카페가 줄을 이었다. 카페에서는 커피, 술, 춤, 미인 등을 팔았다. 이를 사는 모던 걸, 모던 보이를 '에로 그로'라 꼬집었다.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의 합성어였다.

욕망의 극대화는 무교정 다옥정 명치정 황금정 영락정 등 요릿집, 그리고 묵정동 게이샤집 등으로 핵분열 한다. '딴스' 역시 진화돼 규수의 방에까지 비집고 들어갔고, 1950년대 '자유부인'을 낳았다.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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