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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국민일보 1면에 고색창연한 사진 한 장이 실렸다. 1890년대에 촬영한 이 사진에는 숭례문은 물론 성곽 안쪽에 댕기머리 어린이들과 지게꾼 등 인물이 등장하고, 초가지붕을 한 민가의 마당까지 훤히 보여주고 있어 색다른 감회를 던졌다. 도성(都城)의 구성도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오밀조밀하다.

숭례문을 알려주는 자료에는 사진 외에 지도와 문헌이 있다. 지도는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32편 정도가 전해지는데, 모두 숭례문을 한양성의 중심문으로 그리고 있다. 다만 문의 형태가 지금의 우진각이 아닌 팔작지붕 형태도 보여 흥미롭지만 화원이 건축전문가는 아닌 점을 감안하면 별도의 고증이 필요하겠다.

사진과 지도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문헌이 묘사하는 숭례문이다. 목수 신영훈 선생팀이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조사한 건축자료집록에 따르면 숭례문은 태조부터 고종까지 끊임없이 사료로 등장한다. 대부분은 장소적 의미로 쓰였지만 '노등제'와 '타종식' 등 이벤트로 활용한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세종 13년인 1431년 9월의 기록을 보면 "지등(紙燈) 700개를 만들어 숭례문에서 누문∼종루∼야지현∼개천로까지 열자 가량씩 격하여 잇달아 달아 불을 켜서 예배를 행하고, 악공(樂工) 18명과 승도(僧徒) 20명으로 하여금 소리를 내며 즐겼는데, 이를 '노등(路燈)'이라 불렀다"고 적었다. 숭례문 주변에서 흥겨운 연등축제가 열린 것이다.

타종식의 연원도 깊다. 중종 31년 실록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치는 인정(人定)과 파루(罷漏)가 잘 들리지 않으니 숭례문과 흥인지문에 종을 달아 널리 들리게 하라"고 돼 있다. 인정은 밤 10시경에 통행금지를, 파루는 새벽 4시경 통금해제를 알리는 의례다. 그러다가 4년 뒤 "많은 종이 한꺼번에 울려 혼란스럽다"며 금지시켰으나, 종은 그대로 남아 선조 27년인 1594년에 다시 인정과 파루를 행하게 된다.

계획대로라면 2012년이면 새 숭례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국보 1호를 예전처럼 단순한 건조물로 덩그러니 세워 둘 것인가. '노등제'와 '타종식' 등 문헌과 기록에 남아있는 전승행사를 재연해 생생하게 살아있는 문화재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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