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경림 (9) 두 아이 뒷바라지 위해 접시닦이로 나서

[역경의 열매] 신경림 (9) 두 아이 뒷바라지 위해 접시닦이로 나서 기사의 사진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일 당시 톨리도 교회 교인들이 과자를 사가지고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상민아, 과자 먹으렴." 아들에게 과자를 건넸다. 그런데 아들은 사온 과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엄마 이거 나 지금 안 먹고 학교에 싸 가면 안 될까요?" "누가 학교에 간식을 가져가니. 여기서 먹으렴." "엄마 아니야. 간식 싸 가는 거야. 학교에서 그러는 거랬어요." "정말?" 그랬더니 우리 아들 하는 말 "매일 간식시간이 있어요." "그럼 너 왜 엄마한테 얘기 안 했어!" "우리 가난하잖아." 가슴이 미어졌다. 난 엄마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우리 큰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간식을 먹을 때 혼자 운동장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 전체에 한국인은 상민이 하나. 그것도 2학년짜리가 간식 시간에 날마다 외따로 나와 있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두 아이를 먹여 살리려니 내가 일터에 나가는 수밖에. 이를 악 물었다.

나는 무작정 학교 식당을 찾아갔다. 접시닦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유학생은 학내 아르바이트만 할 수 있었다. 내가 접시를 닦겠다고 하니 식당 사람들이 몸집이 작아 안 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주부 경력을 내세워 접시닦이를 시켜달라고 통사정했다. 그래도 안 된다고 하길래 나는 갑자기 손이 비면 연락을 달라며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어주고 돌아왔다.

하필이면 생일날이다. 내 생일날 식당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밥 숟가락을 뜨려다 말고 운동화를 신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가 보니 왜 내가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당장 앞치마를 입으니 가슴부분에 올라와야 할 앞치마가 배에 걸쳐진다. 접시 닦는 일도 철저히 분업화돼 있었다. 자기가 맡은 접시를 집어 흐르는 물에 닦고 건조기에 넣어두는 식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같은 데에 설거지할 접시며 컵이 잔뜩 밀려 들어오는데 나는 키가 작아 점프를 해야 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나는 옆 사람 일도 거들어가며 인심을 얻었다. 식당 사람들은 그런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또 오라고 했다.

나는 정규직원이 됐다. 키가 작아 하이힐을 신고 접시를 닦았다. 접시 닦는 일만도 힘에 겨웠지만 그것만 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었다. 우리 아들이 엄마 가슴 아프게 안 하려고 간식 싸 가야 한다는 말을 못 꺼냈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가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내가 받은 돈은 시간당 2달러 15센트. 한국돈으로 3000원선이다. 생활이 될 리 만무했다. 보통은 세 시간 접시를 닦았고, 연회가 열리면 6시간을 일했다. 나는 다른 일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부엌에 있는 큰 솥을 닦아보겠느냐고 한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솥이 어찌나 크던지. 감당이 안 됐다. 어떤 솥은 깊이가 하도 깊어 구덩이 같았다. 게다가 밑이 고정돼 있어 옆으로 뉠 수도 없었다. 그 솥을 닦을 때면 나는 소리를 질러야 했다. 다 닦았다는 신호로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내 발을 잡고 빼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돈은 모자랐다. 그래서 일을 더 달라고 했다. 접시닦이에 솥닦이 거기에 홀 청소까지 맡게 됐다.

정리=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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