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경림 (12) 장학금 계속 받기 위해 이 악물고 공부

[역경의 열매] 신경림 (12) 장학금 계속 받기 위해 이 악물고 공부 기사의 사진

부총장은 의욕만 잔뜩 앞선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며 따라가기 어려울 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못 따라가면 자진해서 그만두겠다고 답했다.

3시간씩 운전해 학교를 오고간 나는 악으로 버텼던 것 같다. 차도 보통 고물이 아니어서 일단 정지하면 다시 시동이 안 걸려 뒤차 운전자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한밤중에 인적 드문 거리에서 시동이 멈춰 두려움에 떨며 가슴을 졸인 적도 많았다. 그래도 나는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학생 사모를 처음 본 교인들과의 관계도 쉽지는 않았다. 처음 이사 오던 날 교인들이 저녁을 마련해 놓고 기다렸다.

아이 둘과 함께 들어갔더니 한 할머니가 "목사도 거짓말하네. 애가 둘이라 하더니 셋이다." 우선 내가 '애'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교회 어른들은 이 공부하는 사모가 살림을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려고 걸핏하면 우리 집에 오셔서 냉장고도 열고 장롱도 열어보고 찬장의 먼지까지 확인하곤 했다.

나는 행여 남편에게 누가 될까 흠잡히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림을 했다. 그런데 그게 또 문제였다. 이분들이 나를 몇 번 테스트를 해보고는 흠잡을 만한 일이 생기지 않으니 집에 돌아가서는 며느리들을 닥달했다는 것이다. 누구 사모는 애도 둘 키우고, 공부도 해가면서 살림도 잘 하고 사는데 너희들은 뭐하느냐라는 식이다.

몇 번의 통과의례를 거친 뒤 교인들과도 친해졌다. 미국 사람들과 공부하는 사모가 마늘냄새 나면 안 된다고 김치도 계속 담가 주시고, 반찬도 해다 주시고, 한인 타운과 너무 멀리 떨어져 한국 음식을 대하기 어려운 나를 위해 시카고 시내에서 비싼 스시를 사 가지고 와 한밤중에 나를 감격시키기도 하였다. 너무나 정이 들어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 때는 온 식구가 울며 아쉬워했다. 아직도 그분들은 때마다 연락하며 나를 아껴주신다.

게렛에서 받아준 것만도 너무 감사한 나는 별도로 장학금 신청을 안했는데 애슐랜드의 성적이 게렛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게렛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야말로 굿뉴스였다. 남편이 목회를 하면서 받는 수입으로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됐지만 내 학비까지 감당할 금전적 여유는 없던 때였다. 하지만 좋은 소식에도 부담이 됐다.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평점 3.5점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머리에 불이 나도록 공부했다. 평점 3.5점 이상을 유지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시험 때는 하루에 한두시간씩 자고는 세시간 운전하며 다녔다. 너무 졸릴 때는 다리를 꼬집으며 다녔다. 성적은 다행히 잘 나왔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나는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긴 사람이라 어지간해서는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둘째아이 낳을 때는 3일간 혼수상태였고 초등학교 때에도 죽을 고비를 네 번이나 넘겼다. 미국에 와서도 한번 더 죽을 고비를 넘겼다. 박사과정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나는 몸이 무지 약했다. 당시 153㎝의 키에 몸무게가 37㎏이었다. 말라비틀어졌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빈약했다. 그런데도 나는 죽기 살기로 뭐든지 열심히 했다. 아플 여유도 없었다.

정리=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