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경림 (14) 목사 안수 인터뷰 날 신체 마비증상

[역경의 열매] 신경림 (14) 목사 안수 인터뷰 날 신체 마비증상 기사의 사진

미연합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선 여러 과정과 여러 번의 인터뷰를 거쳐야 한다. 마지막 인터뷰를 남겨두었을 때 류머틱 피버(Rhuematic Fever)로 꼼짝을 못하게 됐다. 인터뷰할 때 제대로 걸어 들어가지 못하면 당연히 떨어질 것이었다. 인터뷰 장소까지 데려다줄 교인을 기다리는 동안 지나간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목사가 안 되겠다고 했던 어린 시절, 미국에 와 안수받기로 결심하던 날, 밤잠 못 자며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며 준비했던 과정들…. 그런데 이제 그 마지막 고비에서 중단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하기로 했다. 사실 그런 병에 걸렸다고 하면 마음 아프실까봐 숨기고 있었다. "엄마, 나 지금 목사 안수 인터뷰하러 가야 돼요. 근데 나 많이 아파요." 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알았다. 나 기도한다." 우리 어머니는 내 전화를 끊자마자 기도에 들어가셨다. 1988년 2월의 일이다.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땐 늘 우리 어머니께 기도를 부탁했고, 하나님께선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나는 교인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차에 올라탔고 3시간 거리인 인터뷰 장소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그런데 다른 인터뷰도 아니고 목사 안수를 위한 인터뷰니 더 이상 부축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평생을 건 인터뷰였고 우리 어머니의 평생 기도제목이었던 만큼 나에게는 소중한 기회였고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리며 두 다리로 서 보았다. 부축을 못 받으면 혼자 서지도 못하던 나는 무엇에 홀린듯 스스로 걸어서 인터뷰실로 걸어 들어갔다. 인터뷰가 끝나니 무슨 질문들이 있었는지, 뭐라고 대답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걸 걸고,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인터뷰는 그렇게도 원하던 목사가 되도록 해주었다.

내가 안수받는 날 우리 어머니는 한국에서 먼 미국으로 오셨다.

나는 의도적으로 한복을 입고 안수를 받았다. 감독님과 감리사님이 머리에 손을 얹는 순간, 그동안 쌓였던 눈물들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하나님, 여기까지 왔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새로 안수받은 목사들이 성만찬을 분급할 때 내 감리사님은 우리 어머니를 내게로 모시고 왔다. 어머니의 30년 기도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이것은 엄마를 위해 주신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 때만해도 결혼한 여자는 한국에서 목사 안수를 못 받을 때였다.

위스콘신 연회에서도 한국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게렛신학교에서는 한국 여자가 목회학 석사 학위를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학교에서는 그런 나를 기념해준다며 졸업식 때 특별상도 줬고 졸업 연사로 이화여대 정의숙 총장님을 초청하기도 했다.

남편은 또 그랬다. 내가 정말 안수 받을지 몰랐다고. 한국에까지 내 소문은 퍼졌지만 모두들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그 신경림은 아니겠지"라며 말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연회에서 안수를 받았으니 교회에 가야 했다.

나는 그런데 영어에 자신이 없었다. 1984년 8월 미국에 가 3년반이 흘렀건만 내 영어실력은 아직도 설교를 하기엔 부족했다.

어느 교회를 가야 하나. 그렇다고 한인교회에 갈 수도 없었다. 남편이 목회를 하던 위스콘신의 케노샤에는 전체 한인이 97명. 그 중에 79명이 남편 교회 교인이었으니 내가 그 옆에 한인교회를 개척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정리=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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