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최고 문제작가 ‘손창섭 살아있다’] (續) 제자 노윤기씨 증언 渡日 직전 행적 기사의 사진

영주권 늦어지자 구리 제자 과수원서 지내

재일(在日) 은둔작가 손창섭(87)은 1973년 12월 도일하기 전, 경기도 구리시에 사는 평양 시절 제자 소유의 한 과수원에서 1년여 동안 기거한 것으로 밝혀졌다. 손창섭의 평양 무성공업학교(이후 체신학교에 흡수 통합) 국어 교사 시절(47년)의 제자 노윤기(81·구리시 토평동)씨는 22일 "손 선생은 2년 먼저 일본으로 간 부인 우에노 지즈코 여사가 인보증을 선 일본정부의 영주권 발급 문제가 지연되자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 머물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면서 "당시 거주하던 흑석동 집을 판 연후여서 거처할 때가 마땅치 않은 것 같아 과수원에 딸린 별채 움막을 내드렸다"고 말했다. 노씨는 "손 선생은 도일 이후에도 인세 문제 등으로 두어 차례 귀국해 과수원에 들린 적이 있다"면서 "일본으로도 가끔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도 했으나 10여년부터 소식이 끊겼다"고 말했다.

"개인적 사정으로 늦게 학교에 들어가는 바람에 선생과는 여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그는 "해방 직후 신설된 무성공업학교 시절, 손 선생이 공산주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이었다"며 "수업 때도 체제 비판적인 말을 자주 했던 손 선생은 사상적으로 이북사회와 맞지 않다고 판단해 월남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노씨는 "손 선생은 무성공업학교가 체신학교로 통합되면서 황해도의 한 중학교로 자리를 옮겼으나 적응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노씨의 부인 지춘화(72)씨는 "당시 과수원에서 수확한 사과를 갖다 드릴 적마다 '돈도 안줬는데 어떻게 먹느냐'며 손사래를 치던 손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너무 깐깐한 성격이라 기거하던 별채 내부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씨는 또 "손 선생이 과수원에 머물 때 구리시(당시 남양주군)에 정착하려고 인근 금곡에 짓고 있던 연립주택을 함께 보러 다닌 적도 있었다"며 "우에노 여사가 일본의 가족을 그리워해 먼저 출국하는 바람에 정착보다는 도일하는 것으로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고 있다"고 회고했다. 노씨 부부는 "월남 이후 저명한 소설가로 변신한 손 선생에게 기거한 공간을 내준 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고 있다"면서 "과수원 시절에도 특별한 볼 일이 아니면 외출을 삼가고 거의 집에 머무르며 은둔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같은 증언은 문단 안팎에 떠돌던 도일 직전 손창섭의 행적에 관한 무성한 소문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세간에는 손창섭은 도일하기 전, 경기도 안양 부근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운영했다느니, 혹은 그가 소설창작에 너무 지쳐 있어 도일하게 되었다느니 등의 소문이 나돌았던 게 사실이다.

한편 노씨는 손창섭은 월남 직후, 연세대 뒷산에 움막을 짓고 평양체신학교 시절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밝혔다. 그는 "48년 서울의 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따라간 손 선생은 내 동창생인 나동섭, 이창욱 등과 함께 움막 생활을 했다"면서 "당시 제자들이 구두닦이나 넝마주이를 해서 식량을 구해 손 선생에게 갖다드릴 만큼 사제간의 정은 각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손 선생은 움막 시절에도 웅크리고 앉아 글을 쓰고 있을 만큼 소설에 열정을 쏟았던 분"이라며 "해방 직후 남한으로 내려온 체신학교 시절의 동창 모임이 매년 열리고 있으나 손 선생은 국내에 거주할 당시에도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구리=글·사진 정철훈 기자 chjung@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