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너머] 2부 南村,근대의 엘레지 ⑥ 개화파 개화복 기사의 사진

개화-친일 두 얼굴… 조선, 패션에 눈 뜨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에 시찰갔다가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의 안내로 요코하마 영국인 양복점에서 양복을 해 입은 이들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이미 개화의 물결을 인지한 터인듯 하다. 서광범은 빼어난 체격을 지녔던 듯, 흰 포켓 수건을 장식한 또 다른 양복 사진이 매력적이다. 그래도 개화의 물결을 선두에서 지켜보던 민영익의 사진에는 양복차림이 안 보인다. 그 대신 엄청나게 사치한 조선옷 차림의 사진이 있다.

그즈음 서울에 들어온 외국인은 중국인만 빼고는 다 양복 일색이었다. 1884년 서재필이 만든 개화파와 외국인의 모임 정동구락부(지금의 서울클럽 전신)에 드나든 민영환 등도 양복을 착용했다. 1894년 신식 한국군 군대는 양복 군복에 갓을 썼다. 고종 32년(1895년) 단발령에 외국 복제가 공인되면서 1904년 헤이그회담에 조선대표로 간 이상설 이준 이위종도 양복차림이고 상해의 임정요원들도 양복차림이 많다.

그 이전 1889년에 첫 맞춤 양복점으로 짐작되는 일본인 양복점이 생겼다. 한국인 양복점은 1895년 종로네거리에 백완혁의 한성피복회사 양복부가 생기고, 1896년에는 광교 부근에서 양복과 모자, 구두 등을 판다고 한글과 영문으로 소개한 한 '쥬식회사'가 있다(김진식 지음, '한국 양복 100년사'에서 인용). 이 상점의 활동은 전하진 않지만 후일 한국 남성 양복점이 광범위하게 포진되는 광교와 종로 네거리에서 첫 양복점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뜻깊다.

대궐에서도 고종과 엄비, 순종, 영왕, 덕혜옹주가 양복·양장차림 사진을 남겼다. 단발령을 시행하면서 머리를 깎은 고종의 양복차림은 대원수 복장부터 턱시도, 소매 없는 인바네스 망토에 실크햇을 쓰고 덕수궁을 나서는 차림 등 다양하다. 그래도 탈것은 가마꾼들이 메는 초헌이며 수행원이 뒤에서 받쳐 드는 일산까지 있어 고전과 현대가 뒤섞인 양상이다.

이 시대의 양복 사진을 보면 칼을 찬 서양식 군복 예장이나 금실로 앞가슴을 수놓은 상의에 세모꼴 깃털장식 모자를 든 주영공사 이한응 같은 서양대례복차림도 있다. 외국정부로부터 젠틀맨의 칭호를 최초로 받은 그는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 을사오조약을 막기 위한 유서를 남긴 뒤 양식 대례복을 입고 자결했다.

양복은 격변의 한국 근대사를 거쳐온 물결이기도 했다. 1900년대 초 일본,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장응진(휘문·경기여고 교장) 등 개화파들은 양복에 단장, 중절모에 바이올린을 켜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을사늑약을 지지한 일진회들도 양복을 입었기에 양복은 친일과 개화의 두 얼굴을 지닌 것이었다.

이 시대에 풍양 조씨 세도가문의 후손이 사치 끝에 파산했는데 의복비와 쇠고기 값 빚진 돈이 엄청났다. 흥선대원군 형 흥완군의 복식을 보면 관복 한 종류만 해도 다양하고 호사스럽다. 외국인들은 관복이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 옷인지 놀라워했다. 조선 젠틀맨의 외양은 두루마기와 갓에서 양복과 중절모로 대체됐지만 남자들 옷사치에 드는 돈은 예나 지금이나 여자 못지않게 많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양복점이 여럿 생겨났다. 옛 미도파 백화점자리에서 일본인이 하던 정자옥양복점이 유명했다. 교장이나 고위 직위의 사람들은 양복 외에 연미복을 필수로 마련했다. 월부제도가 있었다. 더러는 일본, 미국에서 배워왔지만 대부분 이런 데서 도제식으로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 이후 한국의 양복사를 주도했다. 지금도 건재하는 종로양복점은 1916년에 시작된 우리나라 최고의 양복점으로 3대째 전해온다.

광복 이후 양복업은 번성했다. 디자이너로 유택, 이용화, 이성우 등이 활약했다. 양복에 특별소비세를 매기기까지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 양복을 짓던 서상국이 이를 폐지하려 애쓰니 도지사가 "주요 수입원인데 폐지는 안 될 말"하고 나설 정도였다. 전란에 물자가 귀해 미군 담요로 양복을 해 입던 시기, 남성 양복의 멋은 밀수 원단으로 지은 양복에 파이프를 문 마카오신사라는 말로 대표되었고 여자들의 호사는 수입 비로드치마 한복이었다.

6·25때 피난을 못 가고 있다가 북한군 사령관의 양복을 해준 일이 빌미가 되어 옥좨 살았던 유명 양복인이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최고의 양복을 짓고 이용화제도상을 만들어 양복발전에 공헌했다. 자신의 묘비에도 양복 상의의 제도를 그려넣었다. 하지만 명동1번지에 있던 그의 양복점은 사후 사라졌다.

한국은행과 조선호텔 사이 중구 소공동은 한국 고급 맞춤 양복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그 자부심은 지금도 대단하다. "재단과 바느질의 최고 기술자들은 지금도 여기다 모여있습니다"라고 디자이너 윤춘국씨가 말한다. 1957년 임응식의 사진 '구직' 에 굶어 지친 듯한 구직자의 모습 뒤로 양복 입은 두 남자가 성공을 즐기는 듯 악수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거리가 바로 소공동이다.

기성복이 나오기 전 1960∼80년 소공동과 명동, 충무로, 광교 일대 수백 개의 맞춤 양복점들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기간에 양복은 2㎝의 바늘 하나로 양복을 만드는 세계기능올림픽에서 12번의 금메달을 연속 차지, 한국장인의 솜씨가 공인되는 계기가 됐다. 양복 교육기관 하나 없는 한국에서 그 일은 기적이었다고 한다. 정치인, 사업가, 직장인이 최고의 솜씨로 만든 옷을 맞춰 입고 세련된 신사의 멋을 즐겼다.

기성복 등장, 맞춤양복의 몰락

1980년대 이후 형성된 맞춤양복 몰락의 결정타를 안겼다. 기성복 때문이었다. 광교에는 한영양복점 한집 만이 남고 소공동에는 해창, 체스터필드같은 십여 군데 정도가 남았다. "오랜 고객 말고도 기성복 입다가 아무래도 불만인 분들이 와서 자기 몸에 맞춘 양복을 찾죠."

일을 하는 만큼 '무장'의 개념으로 어지간한 옷값 지출을 마다치 않는다는 조광호 사장(서울 여의도동) 같은 이도 있고 중소기업을 이끌면서 동대문 원단시장에 가서 바지 하나를 덤으로 더해주는 맞춤양복에 욕심내는 전광배 사장(서울 서초동)도 있다. 중가 국산 기성복도 고가 옷도 아무렇지 않게 입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 최고가 이탈리아 양복의 상표를 떼내고 입는 이명박 대통령도 있다.

'장가갈 때 한번 양복 입고 그 뒤 한 번도 정장은 안 입어봤다'는 40대 화가, 사진가 같은 이는 부지기수다. 그리고 이들 모든 남성 옷에서 공통되는 짙은 파란색 양복은, 조선시대 관복이 청색인 것과 같은 심리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김유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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