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시론

[시론―김기석] 시대의 요구를 외면한 교회

[시론―김기석] 시대의 요구를 외면한 교회 기사의 사진

우수 절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따뜻한 눈물을 목격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행렬을 지켜보며 흘린 선남선녀들의 눈물, 그리고 이미 100만명이 넘는 관객이 찾았다는 독립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워낭소리'를 본 관객들이 흘린 눈물이 그것이다.

그 눈물의 점도가 어떠한지 따져볼 생각은 없다. 다만 악지 부리며 반지빠르게 사는 동안 잃어버렸던 사람들의 순수가 그 눈물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리라는 생각에 감사할 뿐이다. 이미 추기경의 본을 따라 장기 기증을 서약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고마워하며 살라' '사랑하며 살라'는 소박한 교훈이 천금의 무게로 다가오는 것도 느꺼운 일이다.

이런 현상은 현대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정신적 목마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신없이 죄어치는 세상살이에 적응하느라 지친 이들, 갈라터진 논바닥처럼 마음이 헛헛한 이들, 낯선 손님처럼 찾아오는 공허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이들은 그 소박하고 따뜻하고 말 수 적은 종교인과 노인의 삶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삶 앞에 서면 사람은 신을 벗고 싶은 법이다. 각박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살 만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아슬아슬한 생존이나마 이어갈 수 있다. 그리움을 담아 "어이" 하고 부를 때 누군가가 응답해주리라는 기대가 없다면 삶은 적막강산이다.

'차디찬 겨울 감옥 마룻장 같은 세상에/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온/ 한장의 얇은 모포 같은 그대가 있어서/ 아직도 그대에게 쓰는 편지 멈추지 않는데'

도종환 시인의 '희망' 노래가 삽상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요즘 개신교 신자들의 시선이 쓸쓸하다. 드러내 놓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부러움을 동반한 쓸쓸함이다. 교회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런 쓸쓸함이 씁쓸함이 되지 않으려면 이번 일을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클레어몬트대 교수였던 존 캅은 저서 '존재구조의 비교연구' 한국어판 서문에서 1978년 한국 방문 당시 한국 기독교의 약동하던 모습을 상기하고 있다. 그는 그 생동력이 한국인들의 깊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요구에 대해 기독교가 끊임없이 대답을 준 데서 나왔다고 했다. 그로부터 불과 30년의 시간이 지나오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의 분석대로라면 한국 기독교의 침체는 시대의 요구에 대해 교회가 대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도적 민주화와 동구권 해체 이후 사람들은 이전보다 확고하게 자본주의의 매트릭스 속으로 포섭되기에 이르렀다. 끊임없이 욕망을 확대재생산하는 자본 논리에 따라 사람들은 '소비자'로 전락했다. 소비가 늘수록 존재는 줄었고, 경쟁 논리를 내면화하면서 심성은 더욱 거칠어졌다. 숨은 가쁘고 목은 마르지만, 멈추는 순간 넘어지거나 추월 당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멈출 수도 없다. 자신도 모르게 젖어든 이 시대의 음험한 폭력에 흠씬 두들겨 맞아 사람들은 다 상처투성이다.

이것이 종교가 선 자리다. 때로는 예리한 칼날처럼 우리 시대의 탐욕과 느른함과 굳어짐을 베어내고, 때로는 봄바람처럼 불어가 사람들 속에 잠든 착함과 자비를 일깨우는 것이 종교의 책무 아닌가! 이 시대는 경쟁논리와 경제논리의 지배를 벗어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이들을 찾고 있다. 부당함과 불의에 맞서면서도 거칠어지지 않는 이들, 타자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그들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역사의 봄을 선구하는 사람 아닌가?

눅진눅진한 일상에 하늘빛을 끌어들이는 이들이 없어 세상은 잿빛으로 변해 간다. 감동을 주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감동이야말로 우리를 본연의 자리로 되돌리는 계기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