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포럼―엄정식] 義人의 눈물 기사의 사진

우리는 큰 어른을 잃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87세를 일기로 지난 2월16일 선종한 것이다. 장례 기간 중 명동성당에만 40여만명의 추모 인파가 몰려왔고 전국적으로 각 성당에서 100만명 이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국인이라면 종교를 초월해서 온 국민이 그의 선종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 그는 과연 어떠한 인물인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그는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단호히 불의에 맞선 인물이었다. 이미 일제 치하였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다"고 반항하여 퇴학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폭력과 야만 비판에 헌신

박정희 군사정권 때는 그의 장기집권 의도를 처음으로 공개 비판했고 계속되는 긴급조치와 유신 때도 시국성명을 발표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줄기차게 민주 회복을 요구했다. 특히 6·25사변 이후 최대의 민족적 비극으로 막을 내렸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그는 참으로 비통해하면서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그 시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진 고문치사 사건들을 비롯해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행동하는 사제'로서의 용기 있는 자세를 유감 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민주화가 이뤄진 다음에도 그는 계속 인권 신장에 관심을 두어 소외된 장애인이나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목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말년에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에서 "가난한 이들과 살고 싶었음에도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은 주교나 추기경이란 직책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 용기가 없어서였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선종에 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토록 큰 슬픔에 잠겨 그의 상실을 애도한 이유의 전부였을까.

김수환 추기경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고 신중하게 분석해보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성직자였고 구도자였으며 동시에 휴머니스트였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민주화 운동 당시 그의 울분은 극에 달했지만 군사정권 지도자들을 꾸짖고 타일렀을 뿐 매도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좀더 현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가 증오한 것은 폭력이며 매도한 것은 비인간적 야만성이지, 어느 특정한 정권이나 정치인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뤄진 뒤에도 서로 단합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에게 그가 실망한 이유였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시위대를 향해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면서 각목과 화염병을 버리라고 요구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는 경찰에도 최루탄을 쏘지 말 것을 요구했고 또 마침내 그것을 관철시켰다. 학생이나 노동자들, 그리고 민주투사들이 전경을 피해 명동성당에 난입했을 때 그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결심했지만 그들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기보다 그들이 고통받고 억압받는 '인간들'이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이 장기간 성당을 점거하여 농성장으로 삼았을 때 물러갈 것을 요구한 것은 그곳이 어떤 정치적 이념의 성지가 아니라 종교적 구원과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성지'였기 때문이었다고 추정된다.

질곡과 상처가 巨木 키워내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 밝힌 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임종하기 얼마 전 TV 대담 도중에 거의 10분간이나 멈출 수 없었던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스스로 말한 대로 대체로 행복했겠지만 때로는 우유부단하다거나 기회주의적이란 비판 때문에 무척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괴롭히는 사람들도 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분명히 '성자'의 풍모를 지녔다. 이제 우리는 상처받은 조개가 진주를 품듯 수난과 질곡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한 사람의 '의인'을 얻게 되었다.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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