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신경림 (19) “신 목사 후임도 한국 女목사 보내주세요”

[역경의 열매] 신경림 (19) “신 목사 후임도 한국 女목사 보내주세요” 기사의 사진

1988년부터 2년간의 목회는 90년 워싱턴에 가면서 추억으로 남았다. 위스콘신교회를 떠날 때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위스콘신 미국인 교회 목회시절 시아버님 환갑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온 가족이 한국에 잠시 나가 있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 우리 교회 성도들은 내가 행여 안 돌아올까봐 걱정했다. 임원회장은 내가 안 돌아오면 즉시 데리러 오려고 여권을 갱신했다고 했다. 나로선 오히려 오지 말라고 할까 걱정했으면 했지, 안 돌아갈 이유가 없었는데.

우리가 살던 집은 내가 섬기는 미국교회의 목사관이었다. 한국에서 돌아오는 날, 비행기가 연착해 한밤중에 집에 도착했는데 깜짝 놀랐다. 집 앞 나무에 풍선들이 매달려 있었다. '웰컴 홈(welcome home).' 옆을 보니 새로운 농구 골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키 큰 우리 아들이 농구를 좋아하는 걸 알고, 우리가 떠나 있는 동안 선물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상민이 이름도 거기에 새겨놓고.

어리벙벙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더니 딸아이를 위한 카세트 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예지가 어려서 그걸 쓸 나이도 아니었음에도 상민이에게만 선물하기가 미안해 그랬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리고 식탁에는 다음날 아침 식사가 예쁘게 차려져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정이 없다고들 하는데 내가 겪어본 미국 사람들은 안 그랬다. 내가 목회하느라 바쁘다는 걸 알고 할머니 성도들은 내 아이들을 피아노 배우는 데며 운동시합하는 데며 다 데리고 다니고 밥도 챙겨주는 등 보살펴줬다. 내가 출장이라도 가면 남편 밥까지 챙겨줬던 분들이다.

이렇게 정이 듬뿍 들었는데 남편이 워싱턴으로 가니 헤어질 수밖에. 감리사님은 교인들에게 미리 말하지 말라며 자기가 와서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반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 즈음에 "우리 목사 숨겨놓자. 연회에서 알면 큰 교회로 빼갈 거다"라고들 하는 중이었다.

감리사님이 와서 교인들에게 내가 남편 따라 워싱턴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자 교인들은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우리 목사님도 거기 가면 목회합니까." "우리 목사님도 목회해야 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꼭 설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감리사님이 워싱턴 쪽 연회에 부탁하겠다고 했지만 교인들은 안심이 안 되는지 계속해서 내 목회 자리를 꼭 찾아 달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감리사님도 나도 너무 놀랐다. 내가 있으니 얘기를 진전하기가 더 어렵다며 감리사님은 나보고 집에 갈 것을 권유했다. 나는 집으로 갔고 결과를 기다렸다.

회의를 마친 감리사님은 "당신 교인들이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원하는 목사를 보내주겠다고 말하니 한국 여자 목사를 구해 달라고 합니다"라고 결과를 말해주었다.

너무나 감사해서 혼자 방에 들어가 울었다. 사실 처음 목사됐을 때 얼마나 많은 비난을 감내해야 했던가. 시카고 지역 교역자회의에 갔을 때는 다른 목사님들의 쓴소리를 참아내야 했다. 안수받고 처음 한인 교역자회의에 갔을 때 다른 사모님들은 예배만 같이 드리고 모두 다른 방으로 가는데 나는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목사님들과 남아 있었다.



정리=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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