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故 백화종칼럼

[백화종 칼럼] 자기를 못 믿는 정보기관

[백화종 칼럼] 자기를 못 믿는 정보기관 기사의 사진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뭐라도 할 수 있는 곳.' 영국 의회 또는 내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과거엔 중앙정보부로 출발하여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온 우리 정보기관도 무소불위라는 측면에선 영국의 내각보다 못하지 않은 조직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지하실은 정권의 입맛에 맞춰 빨갱이도 만들어내고 반공투사도 만들어내던 곳이었다.

정권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

지난 1973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유신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했다. 정보부의 압력을 받은 검찰은 말할 것도 없고, 대법원까지도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을 적용하여 이 중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은 선고 18시간 만에 집행됐다. 그리고 34년이 지난 2007년 법원은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들이 국가 변란의 목적을 가진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지 않았고 검찰의 조서는 고문·협박에 의한 것이었다며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정보부의 조작과 법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것이다.

1987년, 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는 부인 수지김을 살해하고 월북하려다 실패한 윤태식과 공모하여 부인을 북한공작원으로, 윤을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될 뻔했다 탈출한 반공투사로 만들었다. 진상은 13년 만인 2001년에야 밝혀졌다. 놀라운 것은 정보기관의 부정적 이미지에서 환골탈태하겠다며 명칭도 국가정보원으로 바꾼 김대중 정권에서까지 진상 은폐가 계속됐다는 점이다.

이처럼 필요하다면 못할 일이 없던 정보기관이 최근 다시 조작 시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1987년 있었던 KAL기 폭파사건의 조작 시비가 그것이다. 종전의 예와 조금 다른 건 시비의 양 당사자가 모두 상대방에 대해 사건을 조작했거나 조작하려 시도했다고 주장하는 점과 얄궂게도 국정원이 양 당사자의 한 축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은 "KAL기 사건을 당시의 군사 정권이 조작했다"는 주장이고 다른 한쪽은 "노무현 정권이 명백한 사실인 KAL기 사건을 조작된 것으로 조작하려 했다"는 주장인 것이다.

여러 검증을 거쳐 사건이 조작된 게 아님이 공인되고, 그래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던 이 시비는 김현희씨가 최근 한 언론에 "참여정부시절 국정원에서 사건이 조작됐다는 증언을 하라고 강요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국정원은 진상을 조사 중이라고 한다.

정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KAL기 사건의 조작 시비는 한국 최고 정보기관의 수준을 말해준다. 그 사건은 당시 안기부가 주도적으로 조사했었다. 그런데 만일 정권이 바뀌었다 하여 국정원이 자신들의 전신이 조사 발표한 내용이 조작됐다고 폭로하도록 강요했다면 자기들 스스로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정권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조작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내외에 공표하는 셈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다시 정권이 바뀌니까 과거의 국정원이 진실을 조작된 것이라고 폭로토록 강요했는지 조사한다니 이게 속된 말로 콩가루 집안 아닌가.

이게 다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데서 비롯된 문제들이다. 물론 정보기관이라는 게 공작 음모 등의 단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적(敵)과의 관계에서가 아니고 정권의 하수인이 돼서 정보기관 내에서까지 사활을 건 편싸움과 관련된 것이라면 국가안보가 어찌 될까. 우리의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이런 유의 시비에서 자유로워질 날은 언제일까.

백화종 전무이사 大記者 wjbaek@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