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김의구] 先진상규명보다 중요한 것 기사의 사진

'선(先) 진상 규명'이 요즘 대세를 형성한 모양이다. 지난 1월 용산 참사가 발생한 뒤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인책 여부가 뜨거운 논란을 빚었지만 2월9일 검찰 수사결과가 발표되고 나서야 김 청장이 자진사퇴했다. 촛불 집회 재판과 관련해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신영철 대법관의 경우도 거취 공방이 치열했지만 사전 사퇴 없이 16일 대법원 진상조사단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스캔들이 일어났을 때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공직자부터 자르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선 진상 규명론'은 매우 합리적인 태도라고 여겨진다. 가뭄 같은 천재지변에도 왕권이 흔들렸던 전근대적 사회에서 진일보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아이콘으로도 해석된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우리 공직자들은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었다. 특히 각종 사건·사고가 빈발했던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장관은 물론 총리마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갈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최고 통치권자의 지지율만 의식한 이런 정치 행위가 국가나 국민들에게 과연 실제 이득을 주는 것인지 회의가 적지않았다.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관료사회를 보장하는 게 오히려 국가 발전을 위한 길이라는 지적도 많았다. 최근 나오고 있는 '진상규명 후 인책론'은 이런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한참 미흡하다. 정치 노선에 따라 찬반론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고 여야 내부에서조차 상반된 판단이 나와 혼란이 필요 이상으로 증폭된다.

용산 참사의 경우 '극렬 시위에 책임이 있지 공권력 집행에 있는 게 아니다'거나 '일하다 접시를 깼다고 책임지라고 할 수 있느냐'는 논리가 청와대 등에서 제기됐다. 반면 단순 안전 사고가 아니라 진압작전 과정에서 불상사가 발생한 만큼 공권력이 조기에 지휘책임을 져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야권과 여권 일부에서도 나왔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접시를 깬 정도가 아니라 초가삼간을 태운 것"이라고 했다. 신 대법관에 대해서도 여론에 밀려 퇴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신 대법관을 '심청' 같은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시각도 있다. 물론 신 대법관이 사법부 독립을 훼손한 책임을 지고 조속히 퇴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팽팽했다.

공권력이 이익집단이나 일부 여론에 의해 함부로 폄훼당해서는 안 된다. 공직 종사자들이 죄인처럼 '조리돌림'을 당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명명백백한 비위나 대과를 방치한 채 절차적 완벽만 외치는 것 역시 공허한 일이다. 진상조사의 객관성이나 엄정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면죄부만 주는 꼴이 된다.

우리 사회는 아직 탈권위가 진행 중이다. 지난주에 대법원장이 사상 처음으로 조사를 받았고 지난 5일에는 여야 대치 와중에 국회의장이 야당으로부터 55년 만에 징계요구를 받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탄핵도 있었다. 국민들이 마음 붙일 곳이 하나둘 사라지는데 대안은 나타날 기미가 없다.

대법원의 이번 조사결과 발표는 공권력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계기가 돼야 한다. 충분하고도 정의로운 진실규명을 통해 사법부와 국가 조직에 대한 국민 신뢰를 되찾는 보루 역할을 해내야 한다. 공권력의 권위는 공직자들의 깊은 소명 의식과 청렴강직한 기강에서 나온다. 희생양을 세워 조직을 보호한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며, 공직자 개인을 감싸준다고 만들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김의구 정치부장 e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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