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상권 (5) 완치되고도 고향집 못돌아가 한센병 정착촌서 새 인생 설계

[역경의 열매] 정상권 (5) 완치되고도 고향집 못돌아가 한센병 정착촌서 새 인생 설계 기사의 사진

한센병이 완치돼 소록도를 뒤로 하고 새 삶을 찾아나서는 내 마음에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서 내가 빨리 치료가 되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지만 그동안 정들었던 이들과 헤어지는 것은 안타깝고 슬펐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한센병을 빠르게 치료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진정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병이 완치가 됐어도 나는 보고 싶은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잠잠했던 집안에 다시 풍파를 일으키는 것이라 여겼다. 내가 소록도에 간 것을 아는 사람은 알 터인데 그 아들이 나아서 돌아왔다고 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고 나와 접촉하는 것도 무서워할 것이 뻔했다. 당시 한센병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소록도병원에서 지내며 알게 된 한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네, 곧 여기서 나가게 되면 남원 한센병 정착촌으로 가게나. 이도령과 춘향이의 무대인 남원은 경치가 뛰어난데 한센병력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네.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 보게나."

오랜 투병으로 지친 내겐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는 물어물어 남원 한센병 정착촌을 찾아갔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나아도 얼굴과 손에 남아 있는 후유증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산속에 모여 살았고 이런 정착촌이 전국 곳곳에 있었다.

내가 도착한 남원의 '왕제'란 마을은 당시 8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모두 세상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마치 친자식 이상으로 환대하며 함께 잘살아보지고 손을 잡아주었다. 내 나이 당시 20세,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나이였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그들과 한마음이 되어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발이 온전치 않아 농사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능률이 떨어지다보니 식량 자급자족이 안 되었다.

내가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어머니를 남원에 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집으로 편지를 보내자 한걸음에 달려오신 것이다. 우리 모자는 부둥켜 안고 눈물의 상봉을 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남원에 있는 나를 보기 위해 종종 다녀가셨다. 한번은 어머니가 오셔서 식사를 대접하려는데 쌀이 없었다. 워낙 여유없는 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맛있는 쌀밥 한 번 해 드리기가 어려웠다.

당시 나는 낡은 자전거로 달걀을 팔러 다니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랴부랴 쌀을 구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지만 막막했다. 그런데 골목 어귀에서 갑자기 크고 누런 구렁이가 한 마리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잡아다 팔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 냉큼 구렁이를 잡았는데 예상 외로 순순히 잡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구렁이를 꽤 비싼 값에 팔았다.

나는 먼길을 오신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었는데 그 안타까움을 읽으신 주님이 기적을 베푸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어머니께 쌀밥을 지어 드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사가 절로 나온다. 세심히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정리=김무정 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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