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성만 (2) 신학교 재학중 6·25… 숱한 죽음 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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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으로만 알았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가족을 깨우던 우렁찬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할머니의 기도소리가 그 공백을 메웠다. 할머니는 가족들을 위해 단 하루도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여섯이나 되는 손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기도했다. 특히 장남에 대한 사랑은 좀 특별했다. 어머니는 딸 둘을 낳은 후, 나를 낳았다. 어머니가 나를 낳고 너무 힘이 들어 가만히 누워 있었더니, 아버지가 "또 딸이야?" 하며 휙 돌아서더란다. 할머니가 "애비야. 아들이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반색을 하더란다.

내 이름은 셋이나 된다. 할머니 나이 환갑일 때,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장환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고모는 나를 '장복동'이라고 불렀다. 우리 가문에 큰 복을 불러올 아이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장성만'이다. 성스럽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이름을 지었으리라.

나는 할머니 무릎에 앉아 예배를 드리다가 잠이 든 기억이 수없이 많다. 할머니의 기도와 찬송을 들으며 자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나중에야 알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히 교회에 출석한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었다.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함이었다. 내 또래 아이들에게서 깊은 신앙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를 여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삶의 바로 옆동네에 살고 있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러면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분이 누구인가. 사람을 창조한 분이 누구인가. 죽음 후에는 어떤 세상이 존재하는가. 그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공통된 대답은 단 하나였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었다.

"신학을 공부하자. 신학은 철학보다 우위 학문이다. 나의 삶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이 최고의 삶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할머니의 소박한 신앙과 영감 넘치는 기도에 힘입은 바가 컸다. 당시 부산은 피란민들로 넘쳐났다. 이곳저곳에 판자촌이 들어서고, 판자로 된 예배당도 눈에 띄었다. 마침 서울의 한 신학교가 이곳에 내려와 임시 교사(校舍)를 마련해 수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저없이 그 신학교에 입학했다. 아, 내가 기대하던 바로 그 학문이었다. 이제 비로소 신학을 조직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나는 지적 호기심이 참 강한 편이었다. 새로운 것이 있으면 항상 꼬치꼬치 묻는 성격이었다. 신학에 한참 재미를 들여갈 무렵, 6·25가 발발했다.

"공산당이 지금 낙동강에서 후퇴하고 있다. 모든 젊은이들은 속히 군에 입대하라. 조국을 위해 봉사할 기회다."

나는 군에 입대했다. 미 육군 제2사단에 배치됐다. 후퇴하는 북한군의 뒤를 쫓아가며 수복지구의 치안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창녕 거창 전주 강경 논산으로 이동했다. 당시 우리는 충분한 군사훈련을 받지 않고 입대했기 때문에 총을 쏘는 법도 잘 몰랐다. 위험한 상황도 많았다. 거창에서 전주로 이동하다가 트럭이 전복되는 큰 사고를 당했다. 한번은 북한군이 숙소를 포위하고 무차별 난사한 일도 있었다. 생쥐도 막장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는가. 도주하는 적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죽음!

나는 또 한번 그것의 실체를 보았다. 동료들의 죽음을 생생히 목도한 것이다. 그 비참한 전투장에서 나는 신학에 대해 더욱 깊은 애정을 갖게 됐다.

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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