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너머] 3부 新남촌,강남―성장의 속도 ② 여의도,남서울 개발 프로젝트

[공간+너머] 3부 新남촌,강남―성장의 속도 ② 여의도,남서울 개발 프로젝트 기사의 사진

전근대의 시류도 비켜간 도시속 도시

서울 여의도에서는 동쪽 끝 63빌딩에서 서쪽 끝 국회의사당까지, 남쪽 끝 마포대교에서 북쪽 끝 서울교까지 한눈에 다 보인다. 서울과 인천의 중간거점으로 한강 위에 타원형 만두같이 떠있는 이 섬은 동서 직선거리 2.75㎞, 남북 1.4㎞, 둘레 총연장 7.6㎞, 대지 287만6046㎡(87만평)의 크기이다. 여의도공원과 여의대로가 이곳을 동서로 양분하는데, 3만 주민의 집은 모두 고층 아파트 건물 속에 들어가 동쪽에 모여 있고 서쪽엔 국회의사당을 뒤로 한 업무용 건물뿐이다. 한옥이나 단독주택은 한 채도 없다.

높이로 보면 고층빌딩이 들어선 동쪽에 20∼30층 건물이 즐비하다. 대표적인 건물은 날씨따라 금빛 은빛으로 변하는 유리벽의 63빌딩이다. 하지만 머잖아 72층 파크원빌딩, 55층 국제금융센터 건물이 들어설 계획으로 터를 다지는 중이다. "아파트를 제외하고 78개 상업용 빌딩건물이 동여의도에 있다"고 ㈜빌딩코리아 윤성열 대표가 집계했다. 서쪽은 돔형식의 가장 조악한 현대건물로 꼽히는 국회의사당 주변의 층고가 제한돼 있어 납작해 보인다.

여의도는 서울에서 추려낸 업무지구이다. 금융사만 100여개가 되고 방송·신문 등 언론사, 각급 학교, 종교단체가 있다. 거기서 파생된 관련 업체, 확장된 오피스텔, 인력 등 하루 50만 유동인구가 드나든다. 널찍한 길가의 빌딩들은 외벽에 간판 하나 달지 않고 환한 유리문 속 말끔한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거리의 사람들도 대부분 사무실 주변 인물이고 이곳에서 업무를 보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과거와 연결된 외형적 흔적이 없다. 이곳은 1970년대 고층 아파트 시대의 주거를 이끌어 간 지역사회다. 상점들도 다 조직적인 상가 건물 안에 흡수돼 있다. 얼핏 빅브라더스의 존재가 떠오르지만 여의도는 자족하며 활발히 움직인다. 하지만 주5일 근무제의 대표적 5일 상권이라 오후 8시 이후나 주말이면 휑하니 공동화된다. 남자들도 한밤에 술 마시고 휘젓고 다니기가 겁난다고 말한다.

여의도는 전근대의 전통과는 단절된 근대도시의 이념을 실험적으로 구현시킨 지역이다. 60년대말부터 서울의 확장개발이라는 정치·경제 이데올로기를 구체화시킨 한국종합기술공사에서 30대의 건축가 김수근 등이 제시한 여의도 기본계획안이 변형과정을 거치면서 건설되고 오늘에 이르렀다.

68년 여의도가 처음 건설될 때 콘크리트와 철근 골조 속에 형성돼 가는 모습과 나무 한 그루 없이 땡볕이 내려 쪼이던 풍경은 한 사진작가의 주제로 나타났었다. 여의도 사진을 찍던 내내 어디 한 군 데 쉴 만한 나무 그늘이 없었다는 말은 완전 무(無)에서 생겨나는 도시이야기를 전해준다. 사진에는 아스팔트에서 힘차게 뛰어 오르는 어린이가 있고 빌딩의 형광등이 유리에 반사돼 구름처럼 보인다.

지금 여의도에 남아 있는 대지는 없다. 마지막까지 공터로 남아 비행기 등을 전시하던 수만 평 땅에도 수십 층 건물의 정지작업이 진행 중이고 한 세대가 지나 30∼40년 된 건물들이 재건축을 추진 중이다. 개성을 내세운 국내외 건축가들 빌딩이 많지만 설계를 해놓고서도 경제력이 뒷받침 안돼 못 짓고 사라진 건물도 많다. IMF 때 30층 예정이던 건물이 20층으로 줄어든 것도 그런 여파이다. 지금도 공사가 원활하지 못하다.

70년대 서울도심과 연결되는 단 하나의 도로 마포대교가 있었을 뿐, 황량한 벌판을 다니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추운 날에는 눈물까지 흘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지금은 다리가 세 개에 지하철까지 다닌다. 요즘 여의도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강을 보고 강바람을 느끼는 여유까지 맛본다. 그동안 나무도 많이 자라 벚꽃이 필 때면 구경나온 인파들로 가득하다.

비운의 화가 최욱경(1940∼1985)의 화실이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있었다. 80년대 그의 화실은 눈닿는 곳 전체가 추상·구상의 온갖 생활용품으로 채워져 있어 '화가의 공간이 이렇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때 한창 그렸던, 능선이 움직이는 듯한 산 그림이 많았고 플라스틱 조각같은 하얀 말머리뼈가 기둥에 걸려 있었다.

남자들의 다양한 헤어스타일에 '올백' 등 명칭을 써붙인 빛바랜 포스터도 있었다. 화가는 "이발소 전단이 대단히 순진하고 유머러스하지 않아요?"라고 했다. 천장에 조각처럼 드리운 푸른 헝겊, 벽장문에는 오색실로 묶은 빗자루, 낡은 수저집 등이 화폭처럼 펼쳐져 있었다. 창문에는 온갖 것들이 끈에 주렴처럼 매달려 발을 대신했는데, 너무 환상적이어서 마치 미술전시장에 온 느낌이었다.

근처 원효대교 공사현장에 흙을 몇 더미씩 쌓아놓은 것이 보였다. '저건 꼭 개념미술 같아'라고 그는 홀린 듯 말했었다. "내게 있어 살아 있는 것의 상징은 생명이며 숨이며 바로 라인이다"는 그의 글이 있다. 그림에 많이 보이는 창틀같은 라인은 이곳 시범아파트 화실의 창문, 혹은 기차 안에서 산을 내다보던 창문이 아닐까.

88서울올림픽 때 여의도공원에 독일 쿤스트디스코(예술디스코의 뜻) 클럽이 들어섰다. 건축 음악 조명 연주 의상 무언극 실내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공간으로 30세 미만 젊은이들이 모여 만들었다. 여기서 바우하우스 디자인처럼 새겨진 숟가락 그리고 잔으로 음식을 먹었다. 코르크 옷감에 스펀지 운동화가 장식으로 붙어 있고 철사로 된 갑옷 등 150벌의 파격적인 옷을 입고 춤추는 사람들과 음악에 잠기곤 했다. 올림픽이 끝난 뒤 이 건물은 어느 틈엔가 없어졌다.

몇 년 동안 여의도 광장을 보며 지났다. 남북 이산가족 찾기의 흐느낌이 가득했고 국군의 사열, 종교집회 등으로 인파가 모였다 사라지던 곳. 99년 공원으로 바뀌기 전 아스팔트 광장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팔짱을 낀 채 타는 청년에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고 짬을 즐기는 여성도 있었다. 김포공항에서 들어오던 외국인들은 이곳 광장의 자전거 타는 광경이 첫 번째 인상에 남는 서울 모습이라고 했었다. 언젠가 차를 가지고 이곳에 들이닥쳐 사람들을 덮친 운전자의 심리는 언뜻 이방인같은 존재로서의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이 공원으로 바뀐 뒤 이 근처의 한 직장인은 "이곳이 얼마나 좋은 휴식처인지 모른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길 게 분명하지만 드러나 보이는 광장도 조금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김유경(언론인)

그림 고석원

1970년생. 홍익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홍익대 박사과정. 제26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수상. '국민일보 현대미술 150인 초대전' 등 단체전 100여회, 개인전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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