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성만 (3) 1953년 자택 2층에 성도 7명 교회 개척

[역경의 열매] 장성만 (3) 1953년 자택 2층에 성도 7명 교회 개척 기사의 사진

하나님은 참 오묘하신 분이다.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다. 때로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통해 역사하신다. 나는 축복받은 모태신앙인이다. 할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항서장로교회에 출석했다. 항서교회 김길창 목사님이 내 돌잔치 예배를 드려줬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할머니의 기도와 신앙 덕분이다.

"기도하는 백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기도하는 가정은 망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회사는 쇠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학교는 무너지지 않는다. 6·25의 위험한 상황에서도 번번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할머니의 기도 덕분이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신학교에 복학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아주 혼란스러웠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옥고를 치른 성도들이 풀려나오면서 심각한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킨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단이 설립됐고, 일제에 부역했던 교회들은 더욱 똘똘 뭉쳐 교파를 형성했다. 자유신학과 보수신학의 충돌도 만만치 않았다. 외국에 유학하던 신학자들이 속속 귀국해 새로운 학파를 형성했다. 보수와 진보의 신학논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 논쟁은 곧 교파분열로 이어졌다.

그때 나는 아주 귀한 분을 만나게 됐다. 함경도 북청이 고향인 동석기 목사님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실력있는 목회자였다. 백발의 노목사가 대교동 미국문화원 강당에서 강연회를 열고 있었다. 그때 처음 그리스도의교회(Church of Christ)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일주일 동안 열린 집회에 계속 참석했다. 동 목사님의 메시지는 나의 마음에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성경 이외의 어떤 인위적인 교리나 신조도 거부한다. 우리는 순수한 복음주의로 돌아가야 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리스도의교회는 교파주의를 단호히 배격한다. 우리는 매주 성만찬을 갖는다. 세례 대신 침례를 정례화한다."

동 목사님의 강연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것은 한국교회를 향한 광야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머릿속에 그려온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교회에 등록했다. 장로교인에서 그리스도의교회 교인으로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는 할머니의 신앙으로 버텨왔으나, 이제는 나의 신앙을 분명하게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신앙의 독립선언이었다.

1953년 1월 1일.

인생 여정의 한 획을 긋는 날이다. 우리집 2층에 대교 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했다. 교인은 총 7명. 비록 초라한 예배당이었지만, 말씀을 전하고 성찬식을 베풀었다. 실로 감격적인 예배였다. 대교 그리스도의교회는 곧 국제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국내외에 머물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거 우리 교회를 찾은 것이다. 당시 부산에 머물던 빌스(Bills) 세걸키(Segglki) 엘리스(Ellis)선교사 가족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맥시(Maxey) 데이비드(David) 클라크(Clark) 심스(Sims) 선교사도 교회를 찾아왔다. 우리교회는 갑자기 국제적인 교회로 부상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집결지로 부각된 것이다. 그중에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준 귀한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은 내 인생의 설계도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놓았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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