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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에 이런 얘기를 하면 혹 불경스럽다고 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은돈 서른 닢에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예수가 유죄를 선고받자 결국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스스로 목을 매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받았던 은돈 서른 닢은 과연 어찌 되었을까.

성서는 자살 직전의 유다가 은돈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준다며 성소에 내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그 돈이 예수의 피 값이기 때문에 성전 금고에 넣어둘 수 없다고 하여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그곳을 나그네들의 묘지로 사용하도록 했다(마태 27:3∼8).

피밭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다. 은돈 서른 닢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은돈은 결코 땅 속에 묻히거나 녹아 없어지지 않고 숱한 거래를 통해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끊임없이 옮겨졌을 것이다. 유다는 죽었지만 그를 유혹했던 은돈은 펄펄 살아서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았을 터다. 돈이 무섭다.

돈의 무지막지한 위력을 강조하기는 자본주의사회의 자멸을 예고했던 칼 마르크스 만한 이도 없다. 그는 '자본론'에서 자본과 자본가를 동일시했다. 아니 자본이 자본가를 직접 지배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는 자본을 자본가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놨다.

이익 추구라는 절대적인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지 않는 자본가는 경쟁 자본과 자본가에 의해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자본의 논리에 철저하지 못한 자본가를 자본이 내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살아남기 위해 자본가는 철저한 자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화폐를 뜻하는 돈과 이익 추구라는 목적성으로 무장한 화폐, 즉 자본을 같은 차원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자본의 냉혈성은 유다를 실족케 한 돈의 위력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오늘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공동체 자본주의' 등이 강조되는 까닭이다.

돈과 자본은 때론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계하지 않고 섣불리 대하면 인류 모두를 집어 삼키고도 남을 정도의 기세로 세상을 닦아세운다. 노무현 전 대통령측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수억원의 돈을 받았다고 한다. 마치 돈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집어 삼키는 꼴이다. 정말이지 돈이 참 무섭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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