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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초상화의 왕국이었다. 조선조가 특히 그러했다. 조상을 숭배하고 선현을 공경하는 마음이 초상화로 향했다. 그림 속에 정신이 살아 숨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초상을 앞에 놓고 따르기를 맹세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는 자그마치 70여점에 이른다. 사표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테크닉으로는 공재 윤두서의 초상이 최고로 꼽힌다. 전신사조(傳神寫照)와 배채법(背彩法)을 통해 눈빛에서 터럭 한 올까지 내면의 깊이를 디테일하게 표현했다. 마지막 어용화사 채용신은 130점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권문세가들의 얼굴인 만큼 뽀샵이나 미화의 유혹이 왜 없었을까. 그러나 화원들의 프로페셔널리즘은 흔들리지 않았다. 얼굴 주름이나 시꺼먼 반점은 물론 사시(斜視)까지 그대로 복제되었으니.

이런 전통이 일제 식민시기에 들어 무너졌다. 반지르르하고 뽀시시한 일본식 채색이 존중되면서 수묵 위주의 작법은 회화사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여기에다 6·25 전란 중에 수많은 자료마저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사진기 보급 이후에는 소수자의 기록용으로 연명할 뿐이었으니 전통 초상화의 위기는 말해 무엇하랴.

이런 와중에 다산 정약용의 새 초상이 공개돼 주목을 끌었다. 인물화에 한가락 하는 김호석 화백이 옛 문헌에서 얼굴을 탐색했다. 어릴 적 앓은 천연두 후유증으로 눈썹이 세 갈래로 갈라져 스스로 '삼미자(三眉子)'라는 별호를 지었다는 기록, 방대한 독서량과 저술로 시력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내용 등이 그것이다. 월전 장우성이 그린 기존 영정의 관모와 의복의 오류를 바로잡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키 175㎝ 정도의 50세 중반 인물은 중후한 사상가의 모습보다는 단아한 선비에 가까워졌다. 안경을 쓴 모습이 범생이 같다. 눈에 설다.

5만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얼굴 논란도 이 같은 생경함에서 빚어졌다. 기존의 초상과 새 초상 간 이미지 충돌이다. 각자의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인물의 이미지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니 얼굴 모르는 옛 사람과 친해진다 게 간단치 않다. 새로운 버전으로 다가온 다산과 사임당. 이 걸출한 역사 인물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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