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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손수호] 명동의 부활


명동(明洞)은 서울 중의 서울이다. 면적 0.91㎢의 작은 땅이지만 상징성과 상업성에서 으뜸이다. 외국인들은 고궁, 이태원과 더불어 명동을 3대 관광 포인트로 삼는다. 살아 있는 서울의 맨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동은 땅값이 아직 신흥 강남에 밀린 적이 없다.

명동의 영화는 근대와 함께 시작됐다. 조선조 중기까지는 진고개 주변의 평범한 외곽이었으나 개화기에 도시가 팽창하면서 ‘명례방(明禮坊)’이 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집단거주지로 삼으면서 ‘명치정(明治町)’이라고 불렀다. 어느 쪽이든 ‘밝을 明’은 변함 없었다. 중국 대사관과 중국인 학교가 들어서 화교들도 가세했다. 그들은 청나라 군대의 주둔지라는 연고를 들었다.

돈이 도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지사. 증권거래소를 중심으로 증권회사와 은행이 도열했다. 중앙은행이 지척이었다. 암달러상도 구석구석 둥지를 틀었다. 백화점과 호텔이 줄을 이었다. 음식점이나 양복점도 번성했다. 해방이 되고 일본이 물러가도 돈은 그 자리에서 돌았다.

명동의 명성에 날개를 단 것은 국립극장이었다. 1934년 세워진 바로크 양식의 극장은 명동을 문화예술의 메카로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예술인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거리에는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명동시대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1973년 국립극장이 남산으로 이전하면서 명동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겨우 중저가 의류 중심의 썰렁한 상가로 명맥을 유지했다. 상인들로 구성된 명동상가번영회는 문화공간 하나가 가진 힘을 절감했다. 국립극장 건물을 차지한 대한종금이 1993년 새 빌딩을 짓겠다고 하자 반대운동을 폈다. 1995년 새 소유주 성원그룹이 다시 철거 계획을 밝히자 100만명 서명원부를 내보이며 막았다. 결국 2003년 정부가 극장을 매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시민운동의 개가였던 것이다.

어제 명동예술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개관전람회에 이어 첫 작품으로 ‘맹진사댁 경사’가 6월 무대에 오른다. 때맞춰 삼일로창고극장, 유치진극장, 명동아트센터 등 주변 공연장도 일제히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상업과 문화가 함께 숨쉬는 명동의 새 출발에 박수를 보낸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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