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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임순만] 길 위의 집

[삶의 향기―임순만] 길 위의 집 기사의 사진

전에 한동안 혼자 살아본 적이 있다. 대충 집안 정리를 끝낸 후 혼자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소유하며 생활했다.



퇴근 후에는 스탠드 불빛 하나만을 밝히고 어둑어둑하게 살았다. 혼자서 아침을 맞고 혼자서 잠이 드는 것은 일종의 경이였다. 당장 현관문을 열면 일천만의 인구가 파도처럼 밀려드는 서울에서 절대적으로 혼자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런 어느 날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찬양 한 소절을 듣고 즐거움은 끝났다.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는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 있는' 풍성한 가족관계의 천국을 노래한다. 온종일 땀 흘려 일한 식구들이 한 상에 둘러앉아서 더운 쌀밥과 구수한 된장찌개를 서로 퍼먹는다는 것이 아닌가.

그 봄바람에 한번 쐬고 나자 더 이상 혼자 사는 고독은 씹을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그 직후 아내와 아이들은 외가로 간 긴 방학으로부터 돌아왔다.

엊그제 김병종 화백은 국민일보에 보내온 글 '바보 예수'에 이렇게 썼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잃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였기에 상여의 뒤를 따라가며 자꾸만 흘러내리는 상복을 불편하고 어색해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는 다시는 그분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질녘 아이들과 놀다가 아버지께서 오셨으니 그만 들어오라고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에 함께 놀던 아이들이 모두 들어가 버리고 나면 텅 빈 공터에 나만 남곤 했다. 자라면서 '아버지 오셨다. 어서 들어와라' 단 한번만이라도 나는 이 말을 듣고 싶었다."

우리는 옛 집을 떠나서 저마다 길 위에 집을 세운다. 그 집은 얼마동안, 혹은 오랫동안 남루할 것이다. 남루할수록 눈부실 것이다. 부족한 것은 존재를 깨운다. 바람 부는 길 위에 있는 하나의 집이 떠오른다. TV는 작고, 나이키 운동화가 없는 아이는 하루종일 투정을 부린다.

그러나 그런 날들보다 소중한 것도 달리 없다. 나이키 운동화에 굶주렸던 아이는 안다. 결핍이 얼마나 극진하게 사람을 깨어있게 하는지를. 그래서 그것이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종당엔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감격과 재산이 되는지를.

지난 11일 방한하면서 이번이 마지막 한국방문이 될 것 같다고 한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83)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2차대전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삼년 간 전쟁포로 신세로 있으면서 나는 아무런 고통도 희망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었다. 영혼의 포로상태였다. 그런 어느 날 스코틀랜드의 한 가족들과 함께 도로건설 작업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등에 적혀 있는 번호로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며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과거의 원수였던 나를 허물없는 친절함으로 대하며 인간적인 연대를 보여주는 것을 느끼면서 나의 내면은 바뀌어 갔다. 그들을 만나고 나는 다시 웃을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무감동과 무감각의 날들. 그것을 감동과 예민함으로 바꿔줄 수 있는 으뜸은 가족애에 있고, 가족애의 원천은 결핍에 있다. 부족한 상태라야 충만이 온다. 결핍에 절망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긴 여행길에서 다 잠든 마을에 홀로 켜 있는 불빛을 볼 때, 아직은 미명의 시간에 점점이 밝혀오고 있는 달동네의 불빛을 볼 때 강렬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마천루의 불빛은 그런 자극을 주지 못한다. 부족함과의 싸움, 아니오(No)와의 싸움, 바로 그 현장에 희망이 있다.

임순만 종교국장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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