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포럼―엄정식] 숲과 문명 기사의 사진

숲을 보호하고 생태계를 회복하려는 환경운동이 오늘날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여가를 즐기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자는 것도 아니고, 풍치림을 조성하여 환경을 미화하자는 것도 아니다. 인류의 존속을 위해 숲과 나무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절박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대체로 습기가 있는 물가를 찾아서 서식해온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토양에는 반드시 풀이나 나무가 자라고, 여건이 허락하면 점차 울창한 숲을 이루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부 사막지대를 제외하면 주로 숲을 중심으로 문명을 이룩하고 문화를 발전시켜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숲을 파괴해가면서 존재한 문명

그러나 인간이 항상 숲 속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숲은 분명히 인간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지만 점차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더 이상 충족한 환경을 제공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여건을 마련하기 위하여 숲에서 뛰쳐나왔고, 나무 등을 제거하며 가옥을 짓거나 생활용품을 만들며 그 장소에 경작지를 조성하게 된 것이다. 인류의 흥망성쇠는 숲과 함께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문명은 숲을 파괴함으로써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하나의 숲을 파괴하고 다른 숲으로 옮겨가면서 문명은 부단히 생멸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폐허와 황야만을 남기고 새롭게 숲을 조성하지 않는 문명은 반드시 멸망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가령 숲을 잘라낸 수메르 왕국이 한때 번영하였지만 마침내 사라졌고 마야 문명보다 앞섰던 고대 테오티아칸 문명도 경지를 확장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고 오늘날에도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아시스의 성자'로 알려진 피에르 라비는 그 자신이 오아시스처럼 사막화되어 가는 현대인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미래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 환경운동가로서 활동한다. 그에 의하면 나무는 지구라는 행성에 난 털과 같다. 숲은 하늘을 향한 열망이 있는데, 그것은 태양의 에너지를 받기 위한 행동인 동시에 이 행성이 우주와 소통하는, 말하자면 대지와 하늘을 연결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대지가 사막처럼 벌거숭이가 되고, 나무를 보호하는 잎사귀들이 사라지면 금방 황폐한 침식 작용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아직 숲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숲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었다. 물론 숲이 울창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수록 그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지만 그것이 특정한 문화의 고유한 특성은 아니다. 원시나 문명, 고대와 현대, 그리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사회는 산이나 숲이 신성한 공간이며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본다. 숲은 또한 치열한 사색의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한다. 위대한 사상은 숲 속에서 싹이 텄고 나무와 함께 자라왔으며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다. 깊은 생각과 높은 깨달음은 모두 나무나 숲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러나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이제 숲의 의미도 많이 달라졌다.

인류 존속, 생태계 회복에 달려

장 보드리야르가 잘 지적하듯이 사람들은 숲으로부터 멀어졌고 과거에 공유재였던 것이 희귀재가 되었다. 자본주의가 가세하면서 모든 것이 상품으로 변모하였고 숲의 가치도 점차 가격으로 환산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것은 소비재가 되었으며, 그것도 특권층의 전유물인 사치재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돈을 지불해야 한다. 한때 야만과 원시를 상징하던 숲이 오늘날 고급문화의 꽃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의미를 나타내는 낯선 '기호'가 되었다. 특히 공해와 소음이 가득한 도시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이들에게 숲 속의 휴양지, 삼림욕장, 방갈로 등은 분명히 매력적인 공간으로 등장하고 있다. 숲의 소중함을 새삼스럽게 절감하는 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실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정식(서강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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