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이흥우] 유럽의 역설 기사의 사진

유럽인들은 지난 7일 막을 내린 제7기 유럽의회 선거에서 오른쪽을 선택했다. 선거가 실시된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가운데 대부분 국가에서 좌파는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졌다. 보수 성향 언론은 물론 진보 성향 언론들조차 '유럽인들이 좌파를 벌했다' '유럽 좌파 치욕의 밤'이라는 등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지면을 장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의회 총 736석 중 중도우파 국민당 그룹(EPP-ED)이 265석을 확보한 반면 중도좌파 사회당 그룹(PED)은 184석을 얻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중도우파의 압승이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중도우파 압승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게 있다. 선거 결과 EPP-ED 의석 점유율은 종전 36.7%에서 36.0%로 오히려 0.7%포인트 줄었다. PED 의석 비율이 더 큰 폭으로 하락한 탓에 의석 점유율이 감소했음에도 중도우파 압승으로 비친 측면이 강하다. 이번 선거 결과를 우파의 승리가 아닌 좌파의 패배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웃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극우파다. 극우정당들은 5년마다 실시되는 이번 선거에서 의석 수를 34석으로 늘렸다. 종전에 비해 8석 증가한 수치다. 유럽의회 전체 의석 수가 49석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비약적 발전이다. 실질적 승자는 극우파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중도 좌, 우파에 비하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어서 크게 우려할 바 못 된다고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있으나 1930년대 대공황 때 파시즘을 경험했던 유럽은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국수적인 반이민·반이슬람 슬로건을 내건 극우정당들은 네덜란드 덴마크 헝가리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이탈리아 등에서 두자릿수 득표율(10.2∼17.0%)을 기록했다. 특히 영국에서는 극우정당이 집권 노동당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하는 이변이 연출됐다. 파이낸셜타임스를 비롯한 몇몇 언론은 "외국인 혐오 세력을 합법화해준 선거"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가 중도우파가 선전하고, 극우파가 약진할 수 있었던 토양을 제공했다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좌파 정당이 승리한 국가가 3개국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역설적인 것은 지금의 경제위기가 우파의 경제 이념인 신자유주의 실패에 따른 것이라는 게 사실상 정설로 굳어졌음에도 유럽인들이 오른쪽으로 더 방향을 틀었다는 점이다.

우파가 좌파의 어젠다를 선점함으로써 중도좌파 입지가 좁아진 까닭이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중도우파 집권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적 역할을 확대했기에 가능했다. 우파가 좌파 정책으로 좌파를 제어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진 셈이다. 이는 중도 좌, 우파의 경계가 그만큼 모호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어쨌든 좌파는 우파와 차별화된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졌다. 좌파의 분열과 무능,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경직성도 유럽인들이 좌파를 외면한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이번 유럽의회 선거는 역대 가장 낮은 투표율(43.2%)을 기록했다. 최저 득표율과 극우파 약진은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의 표출이다. 기존 정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누구도 원치 않은 의외의 방향, 이를테면 파시즘으로 흐를 수 있고, 정치 무관심은 정치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는 명제를 이번 선거는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이흥우 국제부장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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