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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동 칼럼] ‘빨갱이’로부터 안전한가

[한석동 칼럼] ‘빨갱이’로부터 안전한가 기사의 사진

한 달 동안 국민들은 감성에 쉽게 휩쓸리는 우리 정치문화를 생생히 경험하고 목도했다. ‘노무현 신드롬’에서 우리 국민의 심성, 바꿔 말해 죽은 자에 대한 관용과 동정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새삼 확인됐다. 장삿속과 냄비근성이 결합된 언론의 보도 행태가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신드롬은 이제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우선은 망각에서일 테지만 순수한 애도 물결에 편승해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던 기회주의 무리들한테 실망한 것도 그 못지않게 작용했지 싶다. 시위가 직업이 된 상습 시위꾼들의 도를 넘은 무례에 대해 세상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낀 염증 또한 작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북한정권은 6·10항쟁 22주년 즈음해 반정부 투쟁을 선동했다. 각계가 총궐기해 끝장을 볼 때까지 결사항전하라는 독려였다. “이명박 패당이 권력의 자리에 들어앉아 독재체제를 부활시킴으로써 남조선은 인민들의 자주적 권리와 존엄이 무참히 짓밟혀 자주와 민주의 폐허지대로, 최악의 인권불모지가 됐다….”

주제 파악을 못하는 것은 아예 그렇다 치고, 믿는 구석 없이 그러기야 하겠는가. 빌미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만끽하면서 반민주·반자본주의 투쟁을 일삼는 자들이 제공해 왔다. 낡은 민족주의 포로가 된 그들은 북한정권의 무능 폭압 등 유례없는 죄악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공화국 북반부’를 그토록 동경하는 사람이면 가서 살면 될 텐데 그런 선택은 기미도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만끽하며 反민주·反자본주의 투쟁 일삼는 자들"

자생(自生)까지 포함해 남한에서 좌파를 자처하거나 진보로 포장한 (친북)좌파는 적어도 10만명이라는 말이 나돈다. 3만∼4만명은 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고 암약중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오래됐다. 확인이 어렵다뿐이지 베트남과 독일 통일 후 선례에 비춰 보면 억측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 과거 남·북베트남과 동·서독의 경우와 비교해 훨씬 가공할 일이 각계각층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을지 모른다.

이념 체제투쟁은 박물관 창고에 가 있어도 시원찮을 판에 1945년 해방 전후의 좌우파 대립, 이를테면 ‘빨갱이시대’가 재현된 데 환호하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는 조선노동당, 각종 선전매체 등 북한의 기관·단체와 그 구성원처럼 기능하는 ‘짝퉁’이 수두록하다. 얼마 전, 어느 국가 원로는 국민 총궐기를 호소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므로 모두 들고 일어나자는 부르짖음은 다수의 상식에 어긋난다.

집회·시위가 헌법에 보장된 권리라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권리를 침해당하고 생업에 지장을 받는 것을 이제 사람들은 배척한다. 지금은 6·10민주항쟁 때처럼 행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박수치거나 합류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들의 이웃은 그만큼 성숙한 것이다.

서울시가 8월 개장하는 세종로 광화문광장과 기존의 시청앞 서울광장 사용 및 관리 조례를 제·개정했다. 요약하면 시민의 안전을 확보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집회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럼 이전에는 폭력집회를 허용한 적이 있느냐다. 친북좌파 성향의 세력들은 걸핏하면 서울 도심을 죽 먹듯이 점거해 폭력시위를 벌였고, 공권력은 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처했다.

새 검찰총장 내정자는 엊그제 “공공의 안녕이 잘 보장돼야 인권도 보장된다”고 말했다. 풀이하자면 법치에 대한 강한 의지 표명이다. 지당한 말을 또 듣게 된 현실은 한심하다. 법질서가 지금까지와 같아서야 나라의 미래는 제아무리 꿈을 꿔봤자다.

편집인 jerome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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