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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저격 100주년 한·일 학자들,이토 히로부미를 논하다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 의사 저격 100주년 한·일 학자들,이토 히로부미를 논하다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 기사의 사진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이성환·이토 유키오 편저/선인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근대 일본 건설의 최대 공로자로 알려져 있다. 입헌군주제 형성의 주역으로 메이지 헌법 제정과 운용, 내각제 창설 , 근대 화폐제도의 확립 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자국 내에서는 균형 잡힌 지도자로 높이 평가돼왔다. 한국 통감으로서의 역할도 온건파로 국제 협조에 주의를 기울이고 한국에 일정한 배려를 하면서 한국의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게 일본 측 시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긍정적 평가는 드물다.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합방을 강압적으로 추진하는 등 일본 정부를 대표해 한국 수탈을 진두지휘한 '침략의 원흉'이라는 이미지가 일반화돼 있다.

올해는 그가 안중근 의사에게 살해된 지 꼭 100년째이며, 내년은 안 의사가 처형당하고 한일합방이 이뤄진 지 100년째가 된다. 이에 교토 대학을 중심으로 한 일본 측 연구그룹이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일본의 과학연구비 보조금을 갖고 한국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를 진행해 이 책을 양국에서 동시 출간했다. 이토에 대한 현격한 인식차를 좁혀보자는 취지다. 그러나 총 15명의 양국 연구자(일본 7, 한국 5)들의 시각은 여전히 긍정과 부정이 충돌하며 엇갈린다. 특히 이토가 한국병합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느냐를 놓고 이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권두의 대표 발제격인 이토 유키오 일본 교토대 대학원 법학연구과 교수의 논문과, 방광석 고려대 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을 통해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이토 유키오 교수 논지의 요점은 이토 히로부미가 당초에는 합병을 하지 않은 상태로 한국의 근대화 및 한일 간 융화를 지향했지만, 한국 측에 그 진의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아 좌절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자세는 합방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한국인의 자발적인 협력을 확보해 저비용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실행해 일본, 그다음으로 한국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반면 방 교수는 한국 학계의 통설대로 이토가 일본 정부의 방침으로부터 벗어난 일이 없으며, 시종일관 합방을 도모했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방 교수는 "이토는 한국의 식민 지배를 전면에서 지휘하기 위해 건너왔다. 따라서 '보호통치'를 시작하는 단계부터 한국병합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라며 "한국민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 보호통치가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즉시병합론에 동조하게 됐다"고 결론지었다.

이외에도 한국 통치에 있어 이토의 본래 의도, 이념, 진정성, 진행 방식, 구체적 정책의 공과(功過) 등에서 양국 학자들 간에 상당한 시각차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 역사적 인물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상황 변화에 따른 '유동성' 때문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겉과 속이 다른 '두 얼굴'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민족주의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두 나라 학자들의 근본적 한계가 깔려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책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유교관' '한국 사법정책과 그 귀결' '통감부의 사법개혁 착수' '보호정책 이념으로서의 한일 협동주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의 파문' 등 다각도의 논문이 실려있다. 그러나 당초 기획 취재대로 이토를 둘러싼 양국 역사인식의 균열이 어느 정도나 메워질지는 미지수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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